"더 향기로운 정원으로"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절실하게 실감 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알고 지냈던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는 저도 이 세상을 떠날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죽음을 아름답게 표현한 글을 얼마 전에 제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다음과 같이 우리말로 옮겨 보겠습니다.

“죽음이란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꽃을 꺾어서 그것을 지금까지 누구도 보지 못한 영원하고 더 아름답고 더 향기로운 정원으로 옮겨 심는 과정이다.”

저는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 덕분에 땅에 씨를 뿌리면 그 씨가 죽어 발아하고 그 원래의 씨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식물이 자라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6절에서는 죽음을 씨앗이 발아하기 위해 썩는 것으로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썩을 몸이 죽지 않으면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셨던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몸을 우리가 가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계속해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눈 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가족이 떠나고 친구가 떠나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아픈 경험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의 죽는 것을 하나님이 귀하게 보신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이 시편 116편 15절에 나옵니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씨앗 하나가 땅속에서 죽은 후 아름다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실 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몸이 죽은 후에도 더 나은 세상에서 새롭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소망 가운데서도 주변 사람의 죽음을 보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럴 때면 저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던 주님을 생각합니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전능하신 주님께서 왜 우셨을까요?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알고 계시며 동정하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성경은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을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을 우리 주님은 아셨습니다. 장차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아신 예수님은 그것을 생각하면서 우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능력이 없어서 우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된 평화에 관한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우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분입니다. 그분께로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눈물을 닦아주시는 하나님
미루는 버릇
심판날의 일곱 장면
나귀의 대속
호세아의 아내
아름다운 이별
예수님 족보의 놀라움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마음이 뜨거워지는 법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아버지의 짜장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아시는 열두 가지
성경의 중심에 위치한 구절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내 이웃의 사르밧 과부
도르가의 바느질
무엇이 우리를 강권하는가?
궁정을 떠난 요안나 이야기
절망의 나락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
두 아들의 어머니 살로메
"나의 아들, 나의 구세주"
"딸아, 평안히 가라"
요엘서의 메뚜기떼
"월삭이 언제 지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