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우리를 강권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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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섬기는 교회에 아프리카에서 유학 온 한 대학원생이 있습니다. 매주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형제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유학생은 자기 쓸 것까지 아끼면서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그 형제가 한번은 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 것에 비하면 제가 드리는 연보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에게는 고국에 아내와 자녀가 있습니다. 이번에 겨울방학을 맞아 그동안 헤어져 있던 가족을 만나려고 어제 한 달 일정으로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교회 재정이 넉넉하지 않지만, 그 형제의 신실함을 보고 교회에서 이번에 항공료 일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 형제를 볼 때면 연보궤에 생활비 전부를 넣었던 과부가 생각납니다. 마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41절부터 44절까지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은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이 당시 예루살렘은 유월절 명절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명절 때 돈 쓸 일이 많았겠지만, 이 과부는 자기가 가진 모든 돈을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연보궤에 넣었습니다. 과부가 바친 돈은 두 렙돈입니다. 돈의 가치로 볼 때 정말 적은 금액이지만,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날 예수님은 부자가 돈을 많이 넣는 것도 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돈의 액수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틀림없이 부자가 넣은 돈의 액수는 과부의 연보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자의 많은 재산에 비하면 그가 넣은 돈은 아주 적은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돈을 요구하는 분이 아닙니다. 바울이 아테네 철학자들에게 그 사실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돈이 필요해서 우리에게 바치기를 원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드리는 연보는 성도를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으로 돈을 가지고 갈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돈을 하늘나라에 미리 보낼 수는 있다.”

무엇이 가난한 과부에게 자신이 가진 전부를 하나님께 바치게 했을까요?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랑일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2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고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유학생을 강권하고 감동하게 만든 것도 다름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가 안다면 우리도 그 과부처럼 자신의 것을 기쁘게 바칠 것입니다.

두 렙돈을 바친 그 과부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9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과부를 사랑으로 지켜 주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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