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속죄일 (1)

이번에는 속죄일 의식과 희생을 소개합니다. 속죄일은 본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연구하는 희생입니다. 레위기 6장 1-34절에 속죄일에 관한 규례와 의식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29장 7-11절에도 속죄일에 관한 언급이 있고 30장 10절에도 나옵니다. 본과에서는 속죄일 연구와 함께 기름 부음 받은 대제사장 아론의 의무에 관해서도 살펴볼 것입니다. 속죄일의 모든 의식은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역에 관한 예언을 함축하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도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속죄일의 역사적 배경
명칭: 속죄일

히브리어로 속죄일을 “욤 키부르”라고 합니다. 이것은 “덮는 날”이란 뜻입니다. 히브리어 “카파”는 “덮는다”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6장 14절에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역청(타르, tar)으로 방주 안팎에 “칠하라(덮으라)”하고 명령하셨을 때도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히브리인에게 가장 중요한 날

속죄일은 히브리인의 의식 가운데 가장 크고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그날 속죄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상징적인 의미를 띠었습니다.

거국적인 행사

이것은 거국적인 행사였지만, 히브리인은 개인적으로도 그날을 깊은 영성 가운데 묵상하는 태도로 참여해야 했습니다. 속죄일의 모든 의식에 자신도 참여한다고 여겨야 하며, 그날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곧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으로 여겨야 했습니다. 이것은 그날 행해지는 모든 의식이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접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속죄일은 하나님과 언약의 백성 간의 대속과 화해를 상징적으로 가장 잘 표현해 주었습니다. 희생의 모든 전제조건과 대제사장의 기능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교제와 언약의 일치를 위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속죄일의 대상과 목적과 필요성을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속죄일의 대상, 목적 및 필요성
죄를 위한 대속을 바침

속죄일은 다음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속죄제는 사람이 정의하는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의하는 죄를 위한 대속이었습니다. 사람의 무지 때문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어긴 많은 율법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지한 상태에서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관점도 일관성이 없습니다. 자신이 죄를 저질렀는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레위기 4장 2, 13, 22, 27절과 5장 15절에서 부지 중에 짓는 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인 줄 알지 못하고 짓는 죄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지은 많은 죄를 무시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 죄들을 무시할 수 없으셨습니다. 그런 죄들도 희생의 피로 덮어져야 했습니다.

희생 제도의 부족이 드러남

희생 제도가 실제로는 죄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을 이스라엘에 깨닫게 하려고 속죄일이 필요했습니다. 속죄일이 보여주는 그림자 속에 그 사실이 잘 들어 있습니다. 속죄일 의식 가운데는 장차 완전하게 죄를 실제로 대속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가리키는 증거가 들어 있습니다. 레위기 16장에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희생 제도의 예언을 통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또 다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의 완성입니다. 속죄일에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전적으로 갈보리 십자가의 그리스도 희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속죄일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으로서 지금도 계속해서 그가 흘리신 희생의 피를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적용한다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미래 세대가 메시아를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그가 성취할 구원의 실체를 그림자로 예언하셨습니다. 히브리인은 그들이 드린 “그림자 희생”이 단지 “그림자 대속”만 할 수 있다는 점을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희생”되어 “실제로 죄 사함”을 가져다준 후에라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속은 보편적이라야 한다

속죄일에 누구나 관심을 가졌던 것은 대속이었습니다. 이는 제사장과 온 나라의 죄뿐만 아니라 성막과 관계된 모든 것을 위한 대속이었습니다. 아론과 그의 집과 온 회중이 속죄일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상징적으로 임재하시는 지성소도 백성의 죄로 부정하거나 속되지 않도록 깨끗하게 해야 했습니다. 성막 뜰의 번제단도 깨끗하고 거룩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많은 죄가 상징적으로 덮어졌기 때문입니다.

온전히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날 죄로 가득한 나라 가운데 임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죄로 물든 이스라엘인이 하나님을 부정하게 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성결케 하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갖는 교제가 그들의 죄 때문에 곡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모든 부정으로부터 깨끗해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무죄하심과 거룩성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매일 드리는 제사가 불충분했음

하나님은 여러 희생 제사가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하나님의 필요는 더욱 더 충족시켜 드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히브리 백성에게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날마다 드리는 제사가 백성이 매일 짓는 죄를 덮기에는 턱없이 부족함이 드러났습니다. 그 희생이 죄 문제 해결에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항상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에서도 이 문제가 더 커졌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알고 있는 율법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속죄일의 필요성을 증대시켰습니다. 비록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희생을 드릴 계획을 세워도 머잖아 자신의 의도를 잊곤 합니다. 그 결과 죄는 덮어지지 않고 남게 됩니다. “다음 주나 다음 달에는 희생을 드려야지”라고 다짐하면서도 이내 잊을 수 있습니다. 무지나 부주의 혹은 망각 때문에 희생 제사를 오래지 않아 잊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죄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대속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저지르는 이와 같은 죄를 덮기 위해 속죄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위한 희생 동물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레위기에서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가 그런 상황 가운데 있다고 해도 몇 달 안에 염소나 양이 다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

이 속죄일에 하나님의 거룩성이 나타나야 했습니다. 불의한 백성을 상대하는 하나님의 의로움도 수호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거하시며 그들과 교제하신다는 외적 상징을 하나님은 갖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은 하나님이 죄 가운데 사는 그들과 한패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었습니다. 죄인과 함께 어울리는 예수님을 본 유대인들도 틀림없이 그런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5:1-2, 마태복음 11:19). 잠재적으로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서 덮어질 수 있었고 예배자들도 하나님과 올바른 교제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속죄일이 필요했습니다.

레위기 16장을 보면 하나님이 죄인들 가운데 함께 거하신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속죄일에 아론은 제사장의 수송아지 피를 갖고 뿌렸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의식도 행했습니다.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들이 범한 모든 죄로 말미암아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 (레위기 16:15-16).

그는 백성을 위해 염소의 피를 갖고 수송아지 피로 그렇게 한 것처럼 똑같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갖고 성막 뜰에 있는 번제단 위에 뿌립니다. “그는 여호와 앞 제단으로 나와서 그것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곧 그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가져다가 제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제단을 성결하게 할 것이요” (18-19절). 이와 같은 의식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부정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속죄일에 강조되었습니다.

모든 제도가 그리스도의 그림자

속죄일은 갈보리에서 이루어질 구속의 완성을 하나님의 백성이 의지하도록 강조했지만, 그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행하는 의식 가운데서 이것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희생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으며,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행하는 모든 일도 “실체”인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를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속죄일은 그들에게 이 사실을 인상 깊게 심어줍니다. 속죄일은 이스라엘의 죄를 슬퍼할 기회를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특별히 그들의 죄를 돌아보고 진실하게 회개하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런 회개는 금식과 죄에 대한 애도를 통해 나타나야 했습니다. 이것은 각 사람에게 개인적이고 영적인 갱신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욤 키부르”(속죄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옮기셨으므로 그들은 용서의 확신을 갖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앞에서 그의 언약을 공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레위기 16:2). 속죄소를 “자비의 자리”라고도 부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는 곳이 바로 그 자리입니다. 자비와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하나님은 그 백성이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공표

온전히 하나님 중심적인 속죄일이 사람의 마음 가운데 분명하게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해 하나님이 노하셨으므로 죄를 지은 백성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드려야 했습니다. 언약궤의 뚜껑(속죄소)에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백성을 위한 희생의 대속을 받아주셨습니다.

매해 축적된 죄를 십자가로 보냄

우리가 희생 제도를 연구하면서 속죄일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이 저지른 한 해의 죄를 갈보리 십자가로 보내 쌓아놓으신 점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연구는 다음 과에서 다룰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죄를 짊어지는 것을 상징으로 보여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이해했든 그러지 못했든 하나님은 분명하게 표징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갈보리 희생이 이루어지면 장차 후대의 사람들이 알게 될 아름다운 그림자 모형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죄가 “앞으로 굴러갔다”는 잘못된 개념

이스라엘의 죄가 그날 용서받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죄가 용서는 되었지만, 덮어진 것은 아닙니다. 레위기와 히브리서를 가르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들의 죄가 한해 “앞으로 굴러갔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속죄일의 희생 가운데 이스라엘의 죄가 다음 속죄일까지 앞으로 굴러갔다는 생각인 듯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해의 희생 동물의 피가 그들의 죄를 또 한해 앞으로 굴러가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죄가 매번 한해씩 그리스도의 갈보리 희생 때까지 그런 과정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합니다.

위 개념에 대한 반론

그러나 이를 깊이 연구해 보면 그 개념의 오류가 드러납니다. 그런 개념을 지지하는 성경적 증거가 전혀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비록 일시적이라도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용서하는 일정한 능력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0장 1-2절은 율법은 장차 오는 실체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10장 4절은 동물의 피가 아주 조금이나 극히 일시적이라도 죄를 없애지 못한다고 우리에게 확인해 줍니다.

또, 히브리서 9장 14절은 그 희생들이 외적인 육체만 정결하게 할 뿐이라고 우리에게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 희생은 사람의 양심이나 영혼을 깨끗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영적, 도덕적 죄를 실제로 없애지 못했습니다. 성막의 의식에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외적인 더러움만 제거했을 뿐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절은 그 희생들이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생각나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속죄일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용서하셨습니다. 장차 그리스도가 갈보리 십자가에서 드릴 희생을 통해 그들의 죄를 덮어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그 책임을 지신 것입니다. 다가오는 좋은 일은 “실체”인 그리스의 희생입니다. 그 희생이 이미 그 당시에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림자 희생은 그림자 용서만 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외적인 더러움만 제거했습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은 양심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희생들은 또 다른 한 해의 죄를 없애지 못했습니다.

대속을 위한 피의 필요성

히브리인은 희생제사에서 그들의 죄를 단지 상징적으로만 희생 동물에게 옮겼을 뿐입니다. 다음 과에서 본 과정을 마칠 때면 이 개념을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나오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여기서 “거의 모든 물건”은 피가 율법 아래서 정결하게 하는 주요한 요소이지만, 유일한 요소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19-21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어떤 것은 피로 정결하게 되고, 어떤 것은 불로, 어떤 것은 물로, 어떤 것은 양털과 우슬초로 정결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율법에 따르면 죄 용서가 피 없이는 절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21절에서 그리스도 희생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더러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피 없이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그 동물 희생의 피 없이는 죄 용서가 없다는 뜻입니다.

죄 사함을 위해 희생이 필요했지만,
죄 사함의 근본 원인은 아니었음

히브리서 9장 22절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율법을 따라”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대속 희생 제물이 피를 흘릴 때까지는 용서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동물 피로 용서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피 없이는 용서받을 수 없었지만, 그 피로 용서받은 것은 아닙니다. 이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6절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는 오순절에 사도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사도행전 22장 16절에서 다소의 사울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어나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베드로전서 3장 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위 모든 구절은 죄 용서를 받는 때가 세례받는 순간임을 나타내줍니다. 그러나 세례받는 물이나 강이나 세례탕이 우리 죄를 용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죄 용서는 세례에서 일어납니다. 세례를 통해 죄인이 그리스도의 씻는 피에 들어갑니다. 세례받는 물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믿는 사람이 세례받는 곳을 통해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니지만, 세례 없이는 깨끗하게 될 수 없습니다. 세례는 죄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구속의 연결을 만들어줍니다.

옛 율법 아래서의 죄 사함

마찬가지로 히브리인은 대속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희생을 드리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를 대속하는 희생 동물의 피가 갈보리의 구속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장차 있을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영적 연결에 들어온 것인데, 그리스도의 피가 실제로 그의 죄를 없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히브리 백성을 용서하실 때 하나님은 십자가를 보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수표나 신용카드와 같습니다. “내가 후에 갚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의로움과 공의에 빚을 진 것과 같지만, 그 빚을 갈보리에 부담시키셨습니다.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15절 말씀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그리스도가 죽을 때 그 수표나 신용카드의 빚을 치르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율법 아래 살았던 사람들이 희생을 드릴 때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는 갈보리를 보시고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갈보리를 담보로 수표를 발행하셨습니다. 그 후 그리스도가 그 빚을 갚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그들의 죗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이 구절에서 예수가 “죄를 속량하려고 죽으셨다”라고 말합니다. 누가 왜 죄를 속량하기를 원하겠습니까?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영혼의 구원에 대한 구절이 나옵니다. 로마서 8장 23절에는 몸의 구속에 대한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죄의 속량”이라고 말합니다. 그 죄는 분명히 이미 용서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죗값이 치러진(덮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갈보리 십자가를 보시고 빚을 치르기 위해 (덮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서 하나님이 십자가로 하신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동물의 피는 사람의 죄에 대한 합당한 형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람이신 예수가 희생하는 피를 요구했습니다. 그 예수의 피가 “이때(현재)에”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움도 나타내 줍니다 (26절).

용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전지하심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예지(미리 아심)가 십자가 이전과 이후의 죄 용서에 관여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미래의 갈보리 십자가를 보고 용서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예지가 (아직 범하지 않은) 우리 죄를 갈보리 십자가로 덮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래 모든 세대의 죄를 모아서 그리스도가 짊어지게 하셨고 갈보리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해 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든 신약시대든 하나님의 예지가 역사하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시간에 구속받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

베드로전서 1장 20절 말씀입니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가운데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신약시대에 그런 것처럼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구약시대를 산 사람들에게도 풍성했다는 점입니다. 구약시대든 신약시대든 기본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목적 가운데 항상 갈보리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씻는 갈보리의 능력이 하나님께는 항상 가능했습니다. 계시록 13장 8절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예수가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었다고 말합니다. 근본적인 사실은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어느 시대 사람이든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이 그의 믿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조건에 순종해야 합니다.

죄 사함에 대한 율법에서의 인식
히브리인은 용서받았음을 알고 기뻐함

속죄일을 연구하면 관심을 끄는 두드러진 사실이 많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그들의 죄가 덮어졌고 용서받은 것을 알고 기뻐했습니다. 레위기 1장 4절에서 사람이 희생을 바치면 그의 영혼을 위한 대속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합니다. 레위기 4장 20, 31, 35절과 5장 6, 10절은 히브리인이 당시에 거기서 용서받았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죽을 때 사람을 용서하신 게 아닙니다. 그 이전에 베푸신 죄 용서를 적법하게 만든 것도 그리스도의 죽음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 이전에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김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비록 죄를 지었지만 말입니다.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경건하지 않은 아브라함을 들어 그의 행함이 아니라 믿음을 보고 용서해 주신 것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15장 6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십시오. 하나님 보시기에 그는 행함으로 아니라 순종하는 믿음으로 의인이었습니다.

매년 그 시기가 중요했음

매년 속죄일의 시기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날은 일곱째 달의 십 일이었습니다 (레위기 16:29). 이 두 히브리 숫자 10과 7에 상징성이 있습니다. 10은 완전수 혹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완성 또는 전체를 의미합니다. 홍수 이전에 10명의 족장이 있었습니다. 소돔 성이 구원받으려면 10명의 의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애굽에 10 재앙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십계명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10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완전수입니다.

숫자 7 또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완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두 단어가 함께 쓰일 때 대속을 위한 하나님의 완전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달의 십 일은 하나님이 구속을 완성하시는 때를 상징합니다. 안식일도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백성의 구속과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누릴 영원한 안식을 상징합니다.

속죄일 준비
백성이 하는 준비

속죄일을 위해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요구된 많은 준비가 있었습니다. 백성은 엄숙한 모임으로 그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들은 회막에 모였습니다 (레위기 16:29-34). 레위기 23장 26-32절에서 그날을 “세배스 세배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대 안식일”인데, 히브리인에게 가장 거룩한 날이었습니다. 어떤 노동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부정하고 죄를 슬퍼하면서 그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날 히브리인들에게 금식이 요구되었습니다. 그날 영적으로 묵상하며 죄를 슬퍼하지 않는 사람은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23:29-30).

대제사장이 하는 준비

아론은 속죄일을 위해 특별한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과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다른 제사장들도 모두 그날 성막 뜰 밖의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이날 제사장들은 죄 지은 온 나라 사람들과 함께 같은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아론만 홀로 그들을 위해 대속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인은 각자 영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면서 죄를 슬퍼하면서 속죄일을 묵상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