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속건제

이번 과에서는 속건제를 다룹니다. 속건제는 레위기 5:14-19; 6:1-7; 7:1-7과 민수기 5:5-8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속건제를 설명하고 그 독특한 의식과 이 희생에서 엄격하게 요구하는 공의와 그에 따르는 책임을 살펴볼 것입니다. 율법은 “눈은 눈으로” 갚는 방식의 공의를 요구했습니다. 우리는 속건제의 성취인 그리스도에 관해서도 살펴볼 것입니다.

속건제는 십계명 후반에 나오는 다섯 계명 곧 사회적 속성에 관한 계명 가운데 하나를 어겼을 때 드리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이에 반해 속죄제는 하나님의 속성과 연관된 십계명의 처음 다섯 계명을 어겼을 때 요구되었습니다. 그러나 속건제는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 곧 하나님의 통치를 어긴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속건제의 배경과 명칭

속건제를 히브리어로 “아샴”이라고 하는데, 문자적인 의미는 잘못된 행동으로 야기된 도덕적 책임이나 부채같은 죄책감이나 빚을 의미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피해를 본 사람의 처지에서 완전한 보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를 수 없었습니다.

이 희생은 이웃에게 저지른 잘못이 하나님과 교제를 파괴하고 이스라엘 백성과의 교제도 파괴한다고 전제합니다. 레위기 6장 2절에 나오는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이 구절은 이웃에게 저지르는 모든 잘못이 곧 하나님에 대한 죄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교제를 잃게 만들며, 영적으로 잃어버린 사람이 됩니다. 이는 그 사람이 성막에서 일어나는 어떤 희생이나 예배 활동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참여자가 아니며 그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예배와 하나님과 교제에 다시 들어가기에 앞서 그 사람 편에서 교제의 회복이 필요했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희생

이것도 “지극히 거룩한 희생”에 속하는 희생입니다. 그리고 번제나 화목제의 특징인 향기로운 냄새는 없습니다. 그러나 속건제는 속죄제와 같은 지극히 거룩한 희생에 속합니다. 히브리인 간의 올바른 관계는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개인적인" 희생 제사

속건제는 개인이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공동으로 드리는 속건제는 없었습니다. 모든 히브리인이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다른 모든 히브리인의 물건을 동시에 훔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속건제는 항상 개인적이었습니다.

속건제는 책임의 정도에 차이가 없었습니다. 지도자, 제사장, 왕이나 일반인 모두 공의는 똑같이 요구되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숫 양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데, 이것은 누구에게나 항상 똑같이 적용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모든 속건제에는 반드시 양 한 마리가 필요했습니다. 이처럼 차이를 두지 않은 데는, 도둑질이나 사회적 악행을 가난 때문에 저질렀다고 핑계 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잘못은 항상 다른 사람의 권리나 재산의 침해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미 설명한 대로 온 나라가 동시에 이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거국적인 속죄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매년 한 번씩 속죄일에 개인도 참여하는 거국적인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속건제는 회중이나 거국적으로 드린 적이 없습니다.

타인의 권리와 재산 존중

율법에는 다른 사람의 권리와 재산을 존중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도 인격 가운데 한 분이므로 이 법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권리도 존중해야 했습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저지른다면, 그 사람은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께 잘못을 저지를 때 드리는 속건제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인 첫 열매 희생과 모든 것의 십 분의 일도 존중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것을 먹고 하나님께 드린 관제를 마실지도 모르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레위기 22:14-15). 여호수아 7장 1절에 아간의 죄가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아이성의 금덩이를 훔쳤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을 훔친 예입니다. 역대하 28장 22절은 우상 숭배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백성으로부터 예배받을 권리가 있는데,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빼앗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라기 3장 8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엄숙하게 묻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습니다”입니다. 말라기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바쳐야 할 수확과 동물의 첫 열매 곧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흠 있고 상처나거나 곧 죽게 될 동물을 희생제물로 드린 것도 그렇습니다. 말라기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말라기 1:8). 하나님이 받으시는 희생은 그의 속성을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속건은 비례적임

레위기 6:1절부터 보면 다른 사람의 권리에 대한 침해가 항상 속건제에 나타납니다. 사람이 이웃의 권리를 침해한 몇 가지 예가 거기에 나옵니다.

이웃을 속임

그 첫 번째 예는 이웃이 맡긴 것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이웃이 재산이나 상대방에게 빌려준 물건을 잘 보살피라고 부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웃의 재산을 침해했습니다. 가축을 돌보라고 부탁했는데 그것을 팔거나 잡아먹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웃의 재산에 대한 침해입니다.

속임수

또 다른 잘못은 다른 사람의 재산인 줄 알면서도 불법적으로 점유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을 팔거나 상대방이 상황을 잘 모르는 것을 악용하여 물건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은 자신이 침해한 다른 사람의 돈이나 물건을 헐값으로 넘기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도둑맞은 재산

이웃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또 다른 예는 재산을 훔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값을 치르지 않거나 동의 없이 가져가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죄입니다. 신명기 27장 17절에서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것은 죄라고 말합니다. 경계표란 재산의 경계를 표시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경계표를 옮기면 다른 사람의 재산을 취하는 것이며 도둑질입니다.

갚지 않은 빚도 이웃에 대한 범죄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이웃에게 빚을 졌는데 언제까지 갚겠다고 약속하고도 그 날짜를 어기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돈이 없으면 결국에는 이웃에게 돈을 빌리게 됩니다. 그런데 약속한 때에 그 돈을 갚지 않으면 그는 이웃의 돈을 그의 동의 없이 압류하는 것입니다.

속임수나 이웃에 대한 억압

이웃을 속이거나 온종일 일한 사람의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은 이웃을 억압하는 죄입니다. 그 사람이 때로는 그 돈으로 그날 저녁 가족이 먹을 음식을 사야 할지도 모릅니다. 계약을 어기는 것도 악행입니다. 레위기 19장 13절부터 보면 이웃의 것을 압류하는 상황이 나옵니다. 절박한 상황에 있는 사람의 것을 가져가면 그를 학대하는 행위입니다. 이를테면 그의 물건을 제값보다 싼 값으로 넘기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잃은 물건을 돌려주지 않음

사람이 잃은 물건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져가 사용하거나 거짓말로 맹세하면 이웃에 대한 학대입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그 물건의 주인은 그의 소유물을 빼앗긴 것입니다. 물건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물건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모른다 해도 자기 것이 아님은 상식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그것을 자기 것처럼 쓸 권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신명기 22장 1-2절은 잃은 재산을 그렇게 처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웃의 가축이 길을 잃은 것을 보면 이웃이 찾으러 올 때까지 잘 붙들어 두었다가 돌려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찾으러 올 때까지 그 가축을 자기 것처럼 잘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반환과 보상
재산의 보상이 먼저임

속건제의 핵심은 엄격한 공의입니다. 반환과 보상은 속건제의 대속 과정에 선행하는 의식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반환은 재산을 먼저 회복시켜주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민수기 5장 7절에서 반드시 잃어버린 부분을 온전히 반환해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인이 죽었는데 그의 재산을 훔친 사람이 잘못을 회개하기를 원하면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갚아야 합니다. 죽은 사람에게 갚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5장 8절은 그의 잘못을 되돌리기 전에 하나님께 먼저 갚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반환 후 보상이 이루어졌습니다.

보상은 추가해야 함

보상은 훔친 가축이나 재산의 가치보다 오 분의 일을 더 해야 합니다. 이것은 십일조의 두 배인 20%인데, 이것을 원래의 가치에 더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축이나 재산을 원래대로 돌려준 후 그 가치의 20%를 더해서 주거나 돈으로 주어야 합니다. 레위기 5장 15절은 반환하고 거기에 20%를 더해주는 것은 벌금이라고 했습니다. 십일조의 두 배는 성전의 세겔로 주어야 했습니다. 이는 변상을 히브리인이 동물 세금으로 사용한 것과 같은 세겔로 갚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20%는 피해 본 사람에 대한 보상으로 여겼습니다. 원래 주인이 자기 소유물을 빼앗겨 다른 사람이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서 아무런 이익도 남길 수 없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 후 피해를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피해 본 사람이 요구하는 공의와 보상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했습니다.

무지가 예외일 수 없음

알고도 죄를 범했든 모르고 범했든 의식에는 변화는 없습니다. 이웃의 재산을 훔쳐 자기 멋대로 쓰거나 팔아버리고 이웃이 혹시 그것을 보았냐고 물으면 “아니오. 보지 못했어요”라고 거짓 맹세한 사람은 믿기 어렵습니다.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고 믿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고의적인 죄입니다. 이웃을 속이는 것은 잘못이며, 반환과 보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반환과 보상이 대속하지 않음

반환과 보상이 완전하게 이루어질 때 죄지은 사람은 이웃과 올바른 관계이지만, 아직 하나님과는 그렇지 않습니다. 보상은 사회적 관계를 회복시키지만, 오로지 대속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화목제를 바쳐야 합니다. 레위기 5장 16절과 6장 7절 말씀입니다. 그래야만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했습니다.

속건제의 기본

속건제는 일대일 공의의 법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것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법처럼 엄격한 공의를 기반으로 합니다.

율법의 엄격한 공의

출애굽기 21장 23-25절에서 만약 심각한 상해가 있으면 율법이 히브리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레위기 24장 17-22절은 여기에 다음 사항을 덧붙입니다. “상처에는 상처로 (예를 들어 뼈가 부러졌다면) 상대방이 한 그대로 갚으라고 했습니다.

긍휼이 없을지라도

신명기 25장 1-3절은 돈이나 재산으로 이웃에게 보상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처벌을 정한듯합니다. 이를테면 이웃을 중상하거나 모욕한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재판관이나 제사장에게 판결을 받으러 갑니다. 그들이 판결을 내립니다. 그 판결은 육체적 처벌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 성격상 돈의 문제가 아니므로 돈으로 회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채찍을 맞는 체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채찍을 맞을 때 정해진 기준은 40대 이하입니다. 이것은 재판관 앞에서 이루어집니다. 40대를 넘기는 채찍질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40대를 채우지 않고 39대를 때리고 그쳤습니다. 적게 처벌할 수는 있지만, 더 많이 처벌할 수는 없었습니다. 40대 채찍을 넘기지 않은 이유는 자기 눈으로 그들의 형제가 모욕받는 것을 피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체벌의 목적은 상대방을 초라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목적은 원수 갚는 것이 아니라 바로잡으려는 데 있었습니다. 만약 40대를 넘겨 때린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복수임이 틀림없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함

신명기 19장 15-19절은 모든 사람이 이웃에 대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 만일 위증하는 자가 있어 어떤 사람이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면 그 논쟁하는 쌍방이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당시의 제사장과 재판장 앞에 설 것이요. 재판장은 자세히 조사하여 그 증인이 거짓 증거하여 그 형제를 거짓으로 모함한 것이 판명되면, 그가 그의 형제에게 행하려고 꾀한 그대로 그에게 행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제사장의 소송

신명기 17장 8-13절은 때로 조정하기가 힘든 형제들 간의 소송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 소송이나 공격적인 비방이 나옵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재판관이나 제사장을 찾아가면 심문을 받은 후 옳은 사람은 옹호하고 악한 사람을 정죄합니다. 그리고 쌍방이 따라야 할 판결이 내려집니다. 당사자는 판결에 따라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수 없습니다. 오로지 법의 정신을 따라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재판관이나 제사장을 경멸한 사람이 어리석고 건방지게 행동했습니다. 그 사람은 판결을 내린 사람을 존중했어야 합니다. 그들이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고, 그들의 판결은 하나님의 판결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르는 벌도 하나님의 판결입니다. 누구라도 하나님의 판결을 거부하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판결에 거역한 오만한 죄를 제거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판결은 의롭고 그의 은혜를 구하는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합니다.

속건제 의식

이번에는 속건제 의식의 각 단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속건제는 첫 단계에 드림이 없는 유일한 희생입니다. 대속을 위해 동물 희생을 드리기 전 공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이 이웃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단계

첫 단계는 공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속을 받아들이기 전에 공의가 선행되기 때문입니다. 공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속을 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민수기 5장 7절 말씀대로 보상이 완전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 다음 잘못으로 손해를 입은 사람에게 원래 가치의 20%를 추가해 보상해야 합니다.

두 번째 단계

속죄제에서 두 번째 단계는 저지른 죄에 대한 구체적인 고백입니다. 그 고백은 공적으로 하게 되어 있었던 듯합니다. 이 희생에서는 희생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지 않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 이유는 잘못한 행동에 대한 배상과 보상이 핵심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또, 이웃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공개적이고 공적인 죄의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모든 것을 바르게 회복시키겠다는 증거입니다.

세 번째 단계

세 번째 단계에서 희생제물을 죽이는데, 이것은 속죄제와 피 흘리는 다른 모든 희생처럼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단계 이전에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하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이 단계는 희생제물을 죽임으로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하늘의 심판을 받아들인다는 증거입니다.

네 번째 단계

네 번째 단계에서는 제사장이 피를 번제단 기둥에 뿌립니다. 흥미로운 것은 속죄제에서는 하나님께 범죄한 죄를 대속하기 위해 번제단의 뿔이나 성소에 있는 향단의 뿔에 피를 뿌렸습니다. 그러나 이 속건제에서는 피를 번제단 하단의 기둥에 뿌렸습니다. 이것은 대속이 이차적임을 나타내주었습니다. 반환과 보상이 여기서 중요한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공개적이고 공적인 고백은 희생제물을 죽임으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한다는 그의 인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피 뿌림은 부수적인 대속을 위한 것입니다.

다섯 번째 단계

다섯 번째 단계에서는 기름을 희생제물에서 제거하여 속죄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번제단에서 하나님께 향기로 드립니다. 속죄제의 기름처럼 이 부분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로 올라갑니다. 이것은 대속이 이루어졌고, 용서가 주어졌으며, 하나님이 기름을 향기로운 냄새로 받고 그것을 기뻐하심으로 교제가 회복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잘못을 저질렀지만,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 회개할 때 그 냄새가 하나님께서 향기롭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그 교제를 허락하셨고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대속이 받아들여진 후에라야 기름이 향기로운 냄새가 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단계

이 희생의 마지막 단계는 희생 동물 몸의 처리입니다. 속죄제에서처럼 속건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위기 7장 7절은 속죄제와 속건제의 법이 똑같다고 말합니다. 이 두 희생에 대한 율법은 하나입니다. 제단에서 희생을 주관하는 제사장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희생제물의 몸을 취합니다. 이것은 성막 뜰에서 먹게 되어 있었습니다 (레위기 7:6). 다시 한번 하나님은 당신의 제사장을 위한 축제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한때 하나님을 떠났다 다시 하나님과 교제가 회복한 사람의 회복과정에 이렇게 참여하는 것입니다. 레위 족속의 모든 제사장이 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속건제의 교훈

속건제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교훈은 사람이 하나님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와 섬김으로 우리 삶을 드리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의 것을 빼앗는 것입니다. 속죄제에서는 올바른 희생으로 죄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사람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속건제에서는 범죄한 사람의 회개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가져와야 합니다 (마태복음 3:8). 속죄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속건제에서도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속건제는 단순히 믿음만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속건제는 회개도 요구합니다.

우리가 속건제에서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은 희생을 드리든지 드리지 않든지 사람이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으면 하나님과 올바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이웃의 돈을 여전히 자기 호주머니에 넣어둔 채로 그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지위나 직책이나 경제적 능력 그 어떤 것도 사람의 잘못을 약화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의가 속죄제에서 만족되어야 합니다. 제사장이나 재판관은 하나님의 판단을 전해주고 사람은 그 결정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밖에 없습니다.

속건제에 대한 아름다운 교훈이 마태복음 5장 23-24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형제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이 분명하다면, 하나님이 대속의 희생을 받으시기 전에 공의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25-26절에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이렇듯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에서 요구하는 엄격한 공의에서 도덕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이 입은 손해대로 먼저 갚아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재판관이나 제사장에게 그 소송이 넘어가면 그들의 판결은 훨씬 엄격할 수 있습니다. 재판관이 무슨 판결을 하든 받아들여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죽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갚지 않는다면 그 빚을 완전히 갚기까지 그 사람이나 그 가족 전체가 그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속건제 예수 그리스도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분입니다. 이사야 53장 10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절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희생을 “만족하게” 여긴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만족”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는 대속의 교리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만족(충족)되어야 한다는 점을 가르치는 성경 구절이 많습니다. 로마서 3:21, 히브리서 2:17, 요한일서 2:2, 4:10.

예수님이 “만족”시키는 분입니다. 그는 우리 죄보다 더 많은 것을 지불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 나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습니다. 그가 우리 빚을 갚아주시고 갈보리 십자가 희생에서 하나님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