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속죄제와 이 희생의 각 분류를 연구합니다. 속죄제에는 다른 희생과 차이가 나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논리상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 관련된 교훈도 있습니다. 의식의 중요한 변화는 속죄제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번제나 화목제와 유사한 점도 있지만, 다른 희생제와는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전에 우리는 “향기로운 냄새”에 속하는 번제, 소제, 화목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지극히 거룩한” 희생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속죄제, 속건제, 속죄일 희생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이들은 “향기로운 냄새”는 아니지만, “지극히 거룩한” 희생이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습니다.
레위기 4:1-5:13, 6:24-30과 민수기 1:21-22에 속죄제의 속성과 이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이 들어 있습니다.
속죄제의 역사적 배경
속죄제 (히브리어 "하타")
속죄제를 히브리어로 “하타”라고 합니다. 이 희생은 모세의 십계명에서 처음 다섯 계명 중 하나를 어겼을 때 드렸습니다. 이것은 죄가 하나님의 속성과 권리를 침해한다는 뜻입니다. 속죄제는 향기로운 냄새의 희생이 아닙니다. 죄 때문에 드리는 희생이므로 향기로운 냄새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 죄란 하나님의 속성과 존귀를 어긴 불순종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향기로운 냄새에 속하는 희생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이 희생에도 “향기로운 냄새”로 부르는 독특한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이 희생은 하나님과 사람 간의 교제가 죄 때문에 손상되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그 사람이 더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지 않으며, 이스라엘 나라와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려면 이 대속의 희생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죄인 줄 알고 범했든 법을 모르고 범했든 죄는 죄입니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죄를 지었든 그렇지 않았든 언약 관계의 회복에 앞서 대속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죄 문제는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항상 사람이 선택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율법을 모르고 죄를 저질렀든 알면서도 저질렀든 사람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율법을 몰랐으니 죄의 형벌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을 알려고 하지 않았으면서 자신이 몰랐으니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부러 알지 않으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율법에 나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대한 무지도 자신이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지론자의 비논리적인 가정입니다. 하나님에 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님과 그의 통치에 대해 알지 않으려고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도 여전히 그의 선택이며 하나님이 보실 때 악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부터 선천적으로 죄짓는 경향이 있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사람이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무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죄짓기를 선택한 것처럼 그는 죄를 짓지 않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죄는 사람의 속성만 해치는 것이 아니라 창조 때 우리에게 주어진 속성까지 파괴합니다. 우리가 불가피하게 죄를 짓도록 창조 때부터 선천적으로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그런 속성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우리 잘못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죄를 유전으로 물려받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범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무죄합니다. 물론 죄는 다른 사람에게 배울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것입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고린도전서 15:33).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베드로전서 1:18). 이 말씀은 우리가 친구를 선택할 때 주의할 것을 경고해줍니다. 성경은 죄의 유전을 말하지 않습니다. 에스겔 18장 1-32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30절에서 이를 명확하게 언급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구약과 신약 모두 이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사람이 저지르는 오만한 죄가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도전적인 거부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면전에 자기 주먹을 휘두르면서 하늘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당신의 율법에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그런 죄를 위한 대속의 희생은 없습니다. 신명기 13:6-9, 17:2-3과 레위기 24:14에 그렇게 오만한 사람이 저지르는 죄를 언급합니다. 그런 사람은 성문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이게 했는데, 그것은 그가 이스라엘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비록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일지라도 레위기 24장에서는 불쌍하게나 긍휼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그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죄는 주변에 있는 사람을 오염시킵니다. 히브리서 10장 28절 말씀입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헬라어 원문은 모세의 법을 “없는 것으로 여기는”)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그러나 경솔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지 못하고 죄를 지었다면 그런 죄는 속죄제로 덮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알지 못하고 지은 죄와 알고서도 오만하게 지은 죄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법 속죄제와 속건제
속죄제와 속건제는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법이었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는 모세의 율법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속죄제나 속건제는 모세의 율법 이전 족장시대에는 없었습니다. 창세기에는 대속의 희생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단지 욥기에서만 욥의 아들들이 혹시 죄를 지었을까 봐 드린 희생이 나옵니다(욥기 1:5). 그러나 그 경우에도 드린 희생은 번제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희생을 드리는 제사장 제도에 대한 언급도 없었습니다. 욥이 그랬던 것처럼 각 족장이 그 족속의 제사장 역할을 했습니다. 아벨, 노아,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희생을 드렸지만, 성막이나 제단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모세 이전 시대에 속죄제나 속건제가 없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오늘날 그런 희생제를 드리지 않습니다.
동물 희생제가 죄를 덮지 않았음
동물의 피가 대속할 수 없음
그러나 죄는 실제로 용서됨
속죄제와 속건제를 드린 후에는 예배자가 실제로 용서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4장 20, 26, 31, 35절과 5장 10절이 이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함을 받으리라.” 동물 피로 용서받은 것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그 피 없이는 용서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모순되는 것 같지만, 외견상 그럴 뿐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이 이를 확인해 줍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인은 자신을 대신하는 희생의 피 흘림이 없이는 용서받을 수 없었습니다. 대속의 희생을 드린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예배자의 순종이었습니다. 그 희생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이 희생하신 피와 구속적인 연결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동물의 피 때문이 아니라 장차 있을 갈보리의 희생을 보시고 히브리인을 용서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로마서 3장 24-27절이 이를 확증해 줍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헬라어 원문은 ”만족“)으로 말미암아….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여기 나오는 “전에 지은 죄”는 율법 아래 지은 죄입니다. 히브리서 9장 15절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죄인의 구분
가중된 대속
죄에 대한 책임의 정도
이스라엘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죄를 범하면 그 영향이 온 나라에 미쳤습니다. 그런 점에서 대제사장은 가장 책임이 컸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대표했고 하나님께는 이스라엘을 대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지위는 지극히 중요했으며 그의 죄는 온 나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금송아지를 만들게 한 죄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온 나라를 우상숭배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으며, 도덕적으로나 교리적인 면에서 온 나라를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죄는 더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특사로 하나님 앞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였으며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라고 불렸습니다 (레위기 4:3).
"이스라엘의 온 회중”은 두 번째로 큰 책임이 있었습니다 (레위기 4:13). 대제사장은 온 회중을 죄에 빠지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온 회중이 대제사장을 대적함으로 이런 죄를 저지를 수 있었습니다. 온 회중이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었으며, 이스라엘 온 나라가 하나님을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큰 책임을 지는 사람은 일반 지도자입니다 (레위기 4:22). 여기에는 족장, 사사, 이스라엘 왕자, 후에는 왕도 포함되었습니다. 이런 지도자들은 온 나라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그들의 죄는 더 무거웠습니다.
네 번째로 책임을 지는 사람은 유대인 공동체인 일반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지위에 따라 그가 저지르는 죄의 심각성이 달랐으며, 그를 위한 대속의 의무도 가중되었습니다.
"내 성소에서부터 시작할지니라"
그 네 구분의 책임은 대제사장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스겔 9장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책임을 대제사장에게 묻고 있음을 분명한 증거로 보여줍니다. 에스겔 9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그에게 예루살렘을 두루 다니며 백성의 죄를 탄식하는 사람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이마에 표가 없는 사람을 칼로 다 죽이라고 처벌자를 보내셨습니다. 죄를 보고 탄식하지 않는 사람은 그 죄를 인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죄에 관여했을 것입니다. 처벌자들은 긍휼을 베풀지 말고 죽이는데 “내 성소에서부터 시작할지니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에스겔 9:6).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중대한 죄가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경고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야고보서 3:1). 바울도 디모데에게 권면했습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디모데전서 4:16). 하나님의 일군은 더 의롭고 신중하게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영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5:4 참조).
책임의 정도에 따라 요구된 동물 희생
네 가지 각기 다른 책임의 정도는 어떤 동물을 희생으로 드려야 하는지를 정했습니다. 가장 큰 책임을 지는 사람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의 희생 제물은 황소라야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비싸고 값비싼 동물 희생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더 심각하고 중대한 죄일수록 더 엄격한 대속이 요구되었습니다. 온 회중을 위해 바치는 희생 제물로 요구된 것은 황소였습니다. 일반 지도자를 위한 희생 제물은 숫염소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일반인을 위한 희생 제물은 암 염소였습니다.
일반인은 암 염소가 없으면 암 양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레위기 5장 7절 말씀입니다. “만일 그의 힘이 어린 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이에 덧붙인 말씀이 11절에도 나옵니다. “만일 그의 손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에도 미치지 못하면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고운 가루 십 분의 일 에바를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 제물로 드리되.” 이것은 몹시 가난한 사람을 위한 배려임이 분명합니다. 십 분의 일 에바는 고운 가루 약 3쿼트(2.8ℓ)였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부터 살펴보면 모세의 율법을 따라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에바 십 분의 일은 피 흘리는 제물이 아니지만, 속죄제의 피 흘림을 대신해 받아들여졌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을 받으시는 것이 사실이므로, 이제 제사장은 그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 흘리는 희생(속죄제)을 그것으로 드렸습니다 (레위기 5:13). 그러면 죄 사함이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희생 동물을 가져올 돈이 없어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누구라도 가난 때문에 구속에서 제외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제물이 고운 가루 십 분의 일 에바(약 2.8ℓ)였으므로 레위기 5장을 보면 그것을 첫 열매 희생과는 구분하라는 주의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는 속죄제라”라는 구절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피 뿌림 – 책임의 정도
피 뿌림은 죄의 책임 정도에 따라 달랐습니다. 대제사장의 죄를 위해서는 성소의 분향단 뿔 위에 피를 뿌려야 했습니다. 이 의식의 독특성이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9:24). 피는 성소에 뿌려지고 그 희생 동물의 몸은 진영 밖에서 불살랐습니다. 그것을 성소로 가져가지 않으면 희생 동물의 몸에 대한 처리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을 위해서는 향단의 뿔에 피를 뿌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단이었습니다.
그 뿔들은 향단에서 가장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 속죄제에서 대속이 핵심이라는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피를 뿌리는 곳은 대속이 최우선이며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피가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히브리 성막의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구분하는 휘장의 뒤편에 상징적으로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들은 지성소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시케나”로 불렀습니다.
향단의 뿔에 피를 뿌리는 것은 대제사장과 온 회중에게 똑같이 적용되었습니다. 그들 모두에게 대속이 핵심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죄가 온 나라에 미칠 때나 온 나라가 죄를 지을 때 그를 위한 대속은 신학적인 면이나 그들의 마음속에서 훨씬 더 중요했음이 분명합니다.
지도자를 위해서는 피를 성막 뜰에 있는 번제단의 뿔 위에 뿌렸습니다. 그 번제단의 뿔도 실제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을 향해 있었습니다. 향단과 번제단의 뿔은 이 희생의 네 귀퉁이에 돋아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향단의 뿔 위에 피를 뿌리지는 않았습니다. 일반인을 위한 피 뿌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도 성막 뜰에 있는 번제단의 뿔에 뿌렸습니다.
희생 동물의 몸
희생 동물 몸에 대한 처리는 대제사장과 온 회중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보여주었습니다. 죄에 대한 책임의 정도에 따라 동물 몸의 처리가 정해졌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레위기 율법에서 그리스도와 연관된 표징을 강하게 보여줍니다. 대제사장과 온 회중을 위해 황소 두 마리의 피를 성소로 가져가므로 이것은 그 희생의 몸이 진영 밖에서 불살라진다는 표징이었습니다. 그 표징과 상징의 성취를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3:12). 그는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것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사람들의 배척을 상징합니다.
대제사장과 온 회중을 위한 황소의 몸은 진영 밖에서 불살랐습니다. 그 몸을 번제단 위에서 불살라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이 희생의 불은 하나님께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이 황소를 삼킨 불은 “세라프”였습니다. 이것은 온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죄에 대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속죄제는 진영 밖에서 불살라야 했습니다.
일반 지도자를 위한 희생 동물의 몸은 진영 밖에서 불사르지 않았습니다. 피도 성소로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일반인을 위한 속죄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희생 동물의 몸을 하나님께 향기로 드리기 위해 제단 위에 놓지도 않았습니다. 이 속죄제를 관장하는 제사장이 하나님께 드리는 이 희생 동물의 몸을 취하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레위기 7장 7절은 속죄제와 속건제에 이 규정이 똑같이 적용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들을 위해 대속하는 제사장의 몫이었습니다. 제사장이 이 희생 동물의 몸을 취했습니다.
제사장은 희생 동물의 가슴을 흔들거나 뒷다리를 들어 올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희생 동물의 몸 전체가 제사장 몫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위기 6장 29절에서 레위 족속의 모든 제사장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희생 잔치의 결과물을 취하는 특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향기로운 냄새의 희생은 아니었지만, 지극히 거룩한 희생이었습니다. 희생 동물의 몸은 제사장의 몫이고 그것을 성소에서 먹게 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거룩한 곳에서 먹게 했다고 말합니다. 이곳은 성막 곧 회막의 뜰을 의미합니다 (레위기 6:26).
이 희생을 성막 뜰에서 먹은 목적은 화목제의 축제와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그 잔치의 참여자만 달랐습니다. 여기서 이 희생 축제를 베푸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지도자와 일반인이 하나님과 교제가 회복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하나님은 다시 한번 잔치 축제를 베푸셨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과거, 현재, 미래의 온 인류를 위해 필요한 구속의 과정을 완성하셨을 때 하늘에서 열린 축제를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하늘로 돌아가셨을 때 계시록을 보면 온 하늘에 축제의 잔치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계시록 5장 9,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온 인류가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예수님이 대속의 희생을 드린 후 메시아의 영광과 승리로 하늘에 귀환하신 것을 하나님은 이와 같은 그림자 표징으로 분명하게 나타내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속죄제 의식
다시 이 희생의 단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드림"의 단계가 있었습니다. 이 단계는 번제와 화목제의 그것과는 분명히 목적이 다릅니다. 여기서는 회중이나 개인이 대속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손을 얹는 것인데, 이것은 저지른 죄를 상징적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다른 희생의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저지른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해야 했습니다. 레위기 4장 4절은 이 희생을 회막 문에서 드리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죄를 고백해야 했습니다. 온 회중이 참여하는 경우 각 족속의 장로들이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 후에 손 얹음이 있었습니다. 온 회중의 경우에는 각 족속의 장로들이 자기 족속을 대신해 희생 제물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들은 온 나라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떠난 구체적인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 후 다른 희생제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처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 희생 동물을 죽였습니다. 피는 이미 설명한 것처럼 네 가지 책임의 정도에 따라 향단이나 번제단에 뿌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희생에서 하나님의 몫인 희생 동물의 기름을 불살라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렸습니다.
이 희생은 “지극히 거룩한” 희생에 속하고, 향기로운 냄새의 희생은 아니지만, 어땠든 기름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였습니다. 죄인들은 분명히 회개했고 죄가 공개적으로 고백 되었습니다. 대속의 희생은 드려졌고 받아들여졌습니다. 용서가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희생에서 기름만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과 죄인의 교제가 이렇게 회복된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다음 단계는 희생 제물의 처리였습니다. 대제사장과 온 회중을 위해 희생된 황소는 진영밖에서 불살랐습니다. 지도자와 일반인의 희생 제물은 성막 뜰에서 베풀어지는 잔치로 제사장 가족의 몫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속죄제 의식의 모든 단계를 마칩니다.
그리스도와 속죄제
그는 속죄제의 실체임
이 개념이 히브리서에 나옴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서 바울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온전한 속죄제가 되기 위한 조건을 충족한 것은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입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서 사도들은 천국에서 누가 큰지를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종이 되는 자가 가장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구절에서 “많은”이란 단어는 대중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26장 28절에서 주님의 만찬을 제정하실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다음은 베드로전서 1장 18, 19절에서 사도가 한 말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서 사도는 예수님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 2절에서 사도가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는 율법을 어기면 죽음의 형벌을 보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하는 믿음을 기반으로 우리 죄의 형벌을 보류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 옮길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육신에” 우리 죄를 정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 죄를 예수 안에서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3절).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속죄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그리스도의 속죄제에서 정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대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이 이를 말해줍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는 우리의 모든 죄악의 결과를 짊어지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4절은 예수님이 세상의 죄를 덮기 위한 흠 없는 어린양이라고 확증해 줍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유대인 시대나 그리스도 시대만 아니라 역사상 모든 인류의 죄를 덮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은 그의 이름이 왜 예수인지를 설명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여기서 “자기 백성”은 구원받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보다 먼저 온 요한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상의 모든 죄를 한 덩어리로 보고 “세상 죄”라고 부른듯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짊어지는 하나님께서 준비한 대속의 희생이 예수라고 확증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