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화목제의 교훈

7과는 화목제 희생의 결론과 이에 대한 설명 및 적용을 목적으로 합니다. 이 희생에 나오는 구약의 원형을 그리스도께서 여러 모양으로 성취하신 점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이 희생의 영적 실체가 많습니다. 끝 부분에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에 대해 살펴볼 예정입니다.

전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평화
평화의 통치

메시아가 오셔서 전 인류에게 평화의 근원이 되신다고 예언한 구절을 찾아보겠습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이사야 9장 6, 7절입니다. 선지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평화의 근원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가 영원토록 평화의 통치를 시작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를 평화의 근원으로 말하는 두 번째 성경 구절은 이사야 53장 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것은 도살자에게 끌려갈 하나님의 어린양에 관한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죄악과 징벌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징벌은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얹으신 형벌 곧 아픔과 고통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싹(가지)/메시아

세 번째 구절은 스가랴 6장 12, 13절입니다.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가리켜 예언에서는 빈번히 “싹”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사야 4장 2절에서는 “여호와의 싹”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그의 신적 속성을 가리킵니다. 이사야 11장 1절에는 그를 “이새의 싹”이라고 불렀는데,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이것은 그의 인성을 가리킵니다. 스가랴에서도 그를 가리켜 “싹”이라고 불렀는데, 그가 성전 곧 장차 올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보좌에서 제사장으로 섬기면서 왕으로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나 왕과 제사장 그 두 직분 간에 평화(조화)가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 왕이 율법을 세우시는 분이며, 그 율법을 어기는 자들을 벌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다스리는 왕국은 의와 공평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똑같은 보좌에서 그는 제사장 역할도 하십니다. 제사장은 왕의 법을 어긴 사람들의 죄를 위해 항상 중재하는 자인데, 그가 제사장으로서 긍휼과 용서와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자 제사장임

이 제사장과 왕의 직분이 서로 대립하는듯하지만, 그리스도는 그 둘을 완전한 평화로 통합하실 수 있었습니다. 다음은 스가랴 9장 9, 10절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 이는 그리스도가 우주적인 평화의 근원이 되신다는 구약의 한 구절입니다.

그리스도가 잔치를 준비하심

화목제의 정점은 희생의 마지막 단계인데, 그것은 성막 뜰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잔치였습니다. 이것은 화평한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완전한 교제가 이루어짐을 나타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예수님의 교훈에 나오는 신약의 몇 가지 실체에 관한 육적 모형이었습니다. 구약의 화목제는 그림자였고 메시아는 그 그림자의 실체였습니다.

아버지가 베푼 잔치에 참여한 탕자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에서 하나님이 방황하고 죄지은 자녀의 회복을 축하하는 감동적인 잔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아들은 집을 떠났고 아버지와의 교제를 잃었습니다. 그는 유산을 탕진했고 잃어버린 자가 되었습니다. 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판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그러나 탕자는 자신을 돌아보고 돼지의 먹이로 살아보려고 했던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황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일어나 아버지에게 가리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버지와 하늘의 법을 어긴 죄를 고백할 것입니다.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고 달려가 그에게 입 맞추고 종을 불러 그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게 했습니다. 그것은 가족의 특권이 회복됨을 상징합니다. 옷을 입히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의 영적 벌거벗음을 덮어준다는 뜻입니다. 그 발에 그 집의 신을 신기라고 했습니다. 종은 신을 신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비유는 자녀와 교제가 회복된 것을 기뻐하는 아버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축제를 히브리의 성막 뜰에서 하나님이 영적으로 참여하시고 기뻐하시는 화목제가 보여주었습니다. 그 성막이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왕자의 혼인 잔치

마태복음 22장 1-4절은 하나님의 집(교회)에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잔치를 베푸신다는 점을 시사해줍니다. 이것은 왕의 아들을 위해 베푼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왕이 종을 보내어 모든 사람을 초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초대를 무시했습니다. 4절을 보면 그 초대가 나옵니다.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나님이 그의 영적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혼인 잔칫집”이 손님들로 가득하기를 원하십니다 (10절).

대 연회

이와 매우 비슷한 비유가 누가복음 14장 15-24에도 나옵니다. 이것은 왕이 베푼 큰 연회의 비유입니다. 그가 많은 사람을 초대했으나 모두 핑계를 댔습니다. 그 연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준비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그 영적 연회가 준비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왕은 그의 잔칫집이 손님들로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23절). 그러나 주님의 초대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잔치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24절).

주님의 나라 식탁에서 먹고 마시라

누가복음 22장 24-30절에 우리의 관심을 끄는 또 다른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주의 만찬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락방에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는 길에 사도들은 하늘나라에서 누가 큰 자인가 하는 문제로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그들은 높은 지위를 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하신 말씀이 27절에 나옵니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26절). 하나님의 나라는 높은 지위 위에 세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27-30절). 이것은 주의 만찬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모습으로 표현된 온갖 영적 복이 내리는 잔치입니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존귀한 손님으로 식탁에 앉게 하실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친히 그들 영혼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섬기는 자가 되실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구약 레위기 3장에 나오는 화목제처럼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준비하신 축제를 아름답게 표현해 줍니다.

누가복음 12장 37절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놀라운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 들리라.” 이 모든 구절에서 예수님은 그가 백성을 위해 주시는 영적 복을 육적인 모양으로 묘사하셨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어느 부분도 주님이 유월절에 세우신 주님의 만찬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화목제의 그림자 속에 나타나는 잔치의 표징을 성취한다는 복음서의 기록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0절에 이와 같은 성격의 놀라운 말씀이 또 나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 구절은 우리에게는 제단(십자가)이 있으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영적 복을 “먹을” 전적인 권리가 있다고 말해줍니다. 이것은 이미 폐지된 히브리 제도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유래된 영적 “음식”을 먹을 권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실체가 온 후에도 레위기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잔치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 옛 제도는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그 희생을 이제 더는 받지 않으십니다. 그에 관한 율법도 없어졌습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로새서 2:14). 골로새서 2장 16, 17절에서 바울은 유대인의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니 몸(실체)은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유대교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우리의 제단에서 먹을 권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제단은 갈보리임이 분명합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인들만 갈보리에서 오는 온갖 영적인 복에 참여할 특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잔치로 표현된 영적 유익입니다.

계시록 19장 9절에서 요한이 말했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 어린양은 분명히 예수님이며 예수님의 신부는 교회입니다.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계시록 21:9). 혼인 잔치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그의 집에서 준비하신 축제의 잔치입니다.

성막 뜰의 잔치는 회복과 교제를 축하하기 위해 하나님이 베푸신다

화목제에 바친 희생 (동물의) 몸은 예배자와 그 가족의 잔치를 위해 하나님이 성막 뜰에서 준비하신 음식입니다. 그 잔치에 나오는 (동물의) 몸은 다름 아닌 예배자의 대속을 위해 바쳐진 피 흘린 몸입니다. 대속이 교제를 회복하고, 교제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축하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아닌 사람은 이 영적 잔치에 참여할 특권이 없습니다. 요한일서 1장 6절에서 요한이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죄를 지으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이 말씀은 거기에는 교제가 없으며 잔치도 없다는 뜻입니다. 7절에서 요한이 말했습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것은 우리 죄를 씻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식탁에 준비된 특별한 음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희생된 (동물의) 몸이 “하나님의 떡” 혹은 “하나님의 식물”임

화목제 희생의 (동물) 몸을 “하나님의 떡” 혹은 “하나님의 식물(음식)”이라고 불렀습니다 (레위기 21:17). 이런 용어는 이것이 단지 예배자만 기뻐하는 축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기뻐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증해 줍니다. 하나님의 떡은 실제로 화목제의 기름입니다. 그것이 향이 되어 향기로운 냄새로 제단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올라갑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향기로운 냄새이며 그가 기뻐하시는 “식물(음식)”입니다. 탕자와 그의 아버지가 서로 나눈 교제를 기뻐했듯이 레위기의 화목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의 실체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에게 그리스도가 가져다주는 실체인 평화의 잔치에 대한 그림자였을 뿐입니다.

계시록 3장 20절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많이 알려진 구절입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것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나오는 영적 유익의 특권을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이 함께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화목제의 표징을 보여주는 신약의 몇 구절 가운데 일부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평화의 근원이라는 구약 예언의 성취를 확증해 주는 구절이 많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화평을 누린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은 주님 안에서 평화가 있음을 제자들이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들이 환난을 겪을 것입니다. 그것은 온갖 물리적인 방해가 세상에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적이고 영원한 평화가 그들에게 있습니다. 주님이 평화를 가져오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이다

로마서 5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는 피가 우리 죄를 없앴으므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평화에 들어간 것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이 구절에 두 개의 완료형 시제가 나옵니다. 헬라어에서 완료형 시제 동사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 현재에도 그 결과가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평화에 들어갔다고 바울이 말했는데, 그 평화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계속되는 특권입니다. 바울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평화에 “(믿음으로) 서 있는” 여기서 완료형 동사가 하나 더 나옵니다. 이것은 그 평화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을 때 시작되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계속됨을 나타내줍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에베소서 2장 11~1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라고 단언합니다. 그는 평화를 만드신 우리의 평화입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적대하게 만든 담을 허시고 한 몸 곧 교회 안에서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둘 사이에 담을 만든 모세의 율법을 폐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가 먼저 하나님과 유대인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셨는데, 이제 유대인은 더는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제 모두 그리스도인이므로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평화를 만드셨습니다.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이방인)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유대인)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7절). 그는 십자가를 통해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만드셨습니다 (15절).

골로새서 3장 15절은 우리의 관심을 끄는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바울은 그리스도가 유대인과 이방인과 하나님 사이에 유일한 평화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만 이처럼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고, 수평적으로는 모든 나라의 그리스도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생명의 떡
예수님이 5,000명을 먹이심

요한복음 6장 30절 이하에서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을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언어의 병행 구절을 살펴보십시오. 레위기 3장과 21장에서 화목제에 바친 (동물의) 몸을 “하나님의 식물(음식)”이라고 부른 점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레위기의 나오는 표징을 사용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복음 6장과 레위기 3장, 21장은 실체와 그림자를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떡과 물고기로 5,000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셨습니다. 배고픈 사람 없이 모두 먹었음을 보여주는 남은 음식 12 바구니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떡과 물고기를 수천 배로 늘릴 수 있음을 본 유대인들은 그를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15절). 그들의 계획을 예수님이 아셨습니다. 그들은 육적 몸을 위해 육적 음식을 가져다줄 수 있는 그런 왕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명은 그 속성상 육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영적 음식을 주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들의 육적 몸을 위해 육적 유익만을 공급하는 그들의 왕으로 삼으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산으로 들어가 기도하시면서 밤을 보내셨습니다. 그날 밤 사도들은 배에 올라 갈릴리 바다 건너 가버나움에서 가까운 디베리아로 향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오시고 폭풍도 잔잔케 하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이 갈릴리 바다 동편에서 예수님을 더는 보지 못하자 그를 찾아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5절). 히브리어로 랍비는 위대한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여기 나오는 성경 구절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단지 그가 만드는 떡과 물고기였습니다. 26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표적(기적)은 분명히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가 예수님임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떡과 물고기의 기적보다 그 말씀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마땅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말씀에는 관심이 없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나무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들은 다시 배가 고팠고 그래서 음식을 먹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예수님이 그 양식입니다. 그러자 그들이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했지만, 본질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이것은 “너희는 나의 기적만 믿지 말고 나를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사람이 참된 “생명의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그 전날 떡과 물고기를 만드신 기적이 그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갖고 계심을 확신하게 하는데 부족했다는 뜻일까요? 그들이 질문했습니다. “(당신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그들은 예수님을 모세와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모세가 그들을 먹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도전인듯합니다. “당신이 모세보다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이 매일 우리에게 떡과 물고기를 공급할 수 있습니까?” 이제 그들은 성경까지 인용했습니다. “기록된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주어진 물질적인 만나와 예수님이 오셔서 주시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은 큰 차이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떡”은 하나님과의 교제이며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공급하시는 잔치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2절). 만나는 “그림자” 떡이고, 그리스도는 “참된” 혹은 “실체의” 떡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늘로부터 옵니다. 예수님이 참된 떡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상징적인 언어의 실체를 보여주시기 위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5절).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람이 이 “생명의 떡”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여전히 육적인 떡을 원했습니다.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4절). 그들은 여전히 육적 음식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 영혼의 모든 갈망과 허기를 만족시키는 분이라는 점을 그들이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명이며 하나님과 교제를 갖게 하는 구속의 음식을 가져다줍니다. 평화는 구원의 최종적 산물이며, 오로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3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유대인들은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48, 49절에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아마도 수많은 사람이 만나를 배불리 먹고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음식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이 먹으면 “영원히 살 수” 있는 “떡”을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육적인 음식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예수님이 그 살을 주셨습니다.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그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렇듯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는 사람은 자신을 대속한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은 주님의 만찬과 관련이 없습니다. 주님의 만찬을 표징하는 것은 유월절입니다. 마태복음 26장 26-29절과 마가복음 14장 22~26절, 특히 누가복음 22장 14~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살(육체)을 희생으로 주시고 그 피를 흘리신 갈보리의 십자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갈보리 십자가를 기념하도록 주의 만찬을 제정하실 때 다락방에서 그의 살과 피를 희생하신 것은 아닙니다. 다락방에서 피를 흘리지 않으셨습니다. 다락방에서 그의 살(육체)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는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그의 살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근원인 그의 희생을 받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갈보리 십자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죄에 대한 심판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갈보리 십자가는 하나님과 평화와 교제를 갖게 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게도 해줍니다. 우리는 영적 생명을 얻기 위해 반드시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 가운데 계속 거하기 위해 그 “살”을 먹고 그 “피” 마시기를 계속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 53~59절은 하나님 아버지와 영적 연합을 갖고 유지하기 위해 갈보리의 은혜를 받아드리기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표현을 유대인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그의 희생적 죽음은 죄를 위한 유일한 (그림자가 아닌) 실제적 대속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3-56절)

히브리 화목제는 예수님이 인류에게 가져올 축제 음식의 상징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성막 뜰의 육적 잔치인 화목제의 희생을 먹은 것처럼 예수님은 히브리 화목제의 영적 원형으로 자신의 몸과 피를 희생으로 드리셨습니다. 유대인은 실제 “생명의 떡”보다 떡과 물고기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주시는데 그들은 땅의 나라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표징과 성취에 대해 말씀을 하시자 유대인들은 정말 큰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60절).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2절).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 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더는 떡과 물고기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들이 떠나기 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63, 6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63절). 이것은 “내가 준 메시지에 영적 교훈(적용)이 있다.”라는 뜻입니다. 육적인 것은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육적인 만나는 유익이 없습니다. 떡과 물고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육적 존재만으로는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영이고 영적 메시지이며 그것이 온갖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유대인들이 떠날 때 예수님이 사도들을 돌아보시면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7, 68절). 이것이 바로 화목제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곧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이며, 그 평화는 예수님이 희생하신 살과 피를 통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주신 구속의 희생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과 평화로운 교제를 맺은 구원받은 영혼을 생각할 때 이것이 왜 “향기로운 냄새”의 희생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언적이며, 레위기에 나오는 그림자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표징이 성취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