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화목제

여섯 번째 강좌는 레위기 3장에 나오는 화목제에 관한 연구입니다. 화목제는 향기로운 냄새의 영역에 속하는 세 번째로 큰 희생 제사입니다. 이것은 예배 희생 가운데 하나이며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드렸습니다. 우리가 이 희생 제사의 독특한 의식을 살펴보려는 이유는 여기에 중요한 변화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화목제에서 희생제물을 분배하는 방법이 레위기에 나오는 어떤 동물 희생과도 많은 차이가 납니다.

화목제의 목적

영어로는 교제(fellowship)의 희생이라고도 부르는 화목제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이 희생은 사람과 하나님 간의 교제가 강화되는 축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모든 희생 가운데 가장 기뻐하는 제사입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하나님, 사람과 그의 가족 간의 화목한 관계를 기뻐하는 축제이기 때문입니다.

화목제 명칭의 중요성

히브리어로 화목제를 “셀렘”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평화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샬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옛날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히브리인은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그러나 여기 나오는 화목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복수형 “셀라민”이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중적인 성격의 평화를 가리킵니다. 곧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간의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히브리인은 이것을 완성의 희생이라고도 부릅니다. “셀렘”은 뭔가 부족하거나 채워주기를 원하는 것을 완성해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이 자기 죄나 허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손상되었다고 느낄 때 이 희생을 통해 그것을 채워서 완성하려고 했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할 때 먼저 드려야 할 희생은 대속을 위한 속죄제나 속건제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여전히 먼 관계에 있거나 관계가 손상된 상태에서 화목제를 드리는 것은 올바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언약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이 화목제를 드리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멀어진 관계에 있는 사람이 먼저 드려야 할 희생은 화목제나 번제나 아니라 속죄제라야 합니다. 속죄제는 대속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회복된 관계가 하나님과 사람 간의 관계를 축제의 관계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축제에 참여하기 전에 화목한 관계 회복이 항상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과 언약 관계 밖에 있는 사람은 이 희생을 드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도 하나님과 언약 관계 밖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동물을 받아 그것을 화목제로 드릴 수 없었습니다. 화목제를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과 좋은 관계에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희생은 회복의 마지막 단계에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회복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축제 희생의 음식이었습니다. 이것은 회복된 관계에 대한 감사의 자연스러운 표현입니다.

속죄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유대인이 어떤 형태로든 화목제에 참여하는 것은 옳지 못했습니다. 레위기 7장 18~21절은 하나님께 멀어진 사람이 이 희생에 참여할 특권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116편 17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그러므로 이 희생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 목적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저와 하나님 간의 교제와 연합과 친밀감이 강해지기를 원합니다.”

화목제의 세 종류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화목제

화목제는 세 가지로 구분되었습니다. 그 첫째는 감사제라고 불렀습니다. 레위기 29장 29절에 서는 이것을 “호라”라는 하는데, 이 단어의 뜻도 같습니다. “호라”는 “만세(hooray)”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할렐루야!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뜻과 같습니다. 이것을 감사의 희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이 평화를 회복시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대속의 희생을 받으시고 그 희생을 바친 사람을 옳다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대속이 받아들여졌으므로 그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높은 수준의 화목제인 “호라”입니다.

레위기 7장 15절에서 이 호라 동물의 몸은 그 희생의 첫째 잔칫날에 먹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축제이고 희생의 음식이었습니다. 첫째 날이 지난 후 그 가운데 남은 부분은 진영 밖에서 불태워야 했습니다. 둘째 날에는 그것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번제에서 나온 짐으로 하나님께 거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희생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강하게 해 주는 데 주목적이 있었습니다.

레위기 22장 26-31절을 보면 화목제 의식을 적절하게 따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희생 동물은 흠이나 점이 없어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희생제물로 새는 제외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축제에 쓰일 충분한 고기를 새에서 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맹세의 화목제

두 번째 화목제는 낮은 단계의 희생입니다. 이 희생은 히브리어로 “네더”입니다. 레위기 21장 21절을 보면 이것은 맹세가 따르는 희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즐거움이 이 희생의 개념에 들어 있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나 그의 가족 혹은 그 두 가지 모두 이 희생을 통해 그의 맹세를 갱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낮은 단계의 희생이기 때문에 레위기 19장 5-6절에 따르면 첫째 날에 남은 동물의 어느 부분이라도 둘째 날에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셋째 날에는 그것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셋째 날부터는 그것이 희생과 예배자를 부정하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도 욕되게 했습니다(레위기 19:7-8). 셋째 날부터는 육체가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9절을 보면 나사로의 시체가 나흘 후에 썩는 냄새가 난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문에 셋째 날 이른 아침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몸이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희생 의식과 셋째 날 이후로는 고기를 먹지 않은 사실 간에 상징적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셋째 날부터는 부패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유 의지로 드리는 화목제

마지막 세 번째 화목제는 자유 의지로 드리는 희생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이것을 “네데바”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자발적인 것으로 이것도 둘째 날에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의식의 각 단계

화목제를 어떻게 진행하는지를 그 의식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희생의 첫 몇 단계는 그 형태가 번제를 닮았습니다. 드림, 손 얹음, 희생 동물을 죽이고 그 피를 뿌리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이 희생의 독특한 차이점이 드러났습니다. 이제 그 각 단계와 거기에 들어 있는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 단계:
드림
(Presentation)

첫 단계는 희생을 드리는 것입니다. 번제에서 드림의 목적은 히브리인이 하나님께 자신을 성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화목제에서는 드리는 단계에도 이 희생만의 독특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뻐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이 축제에 참여하려는 소원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드림의 단계에서 히브리인이 희생 동물과 함께 제단으로 나오는 이유가 번제와는 달랐습니다. 여기서 예배자는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자신과 하나님 간에 영적 연합을 강화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단계는 번제와 같았지만, 그 목적은 번제의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둘째 단계:
손을 얹음

화목제의 둘째 단계에서 예배자가 손을 희생 동물의 머리에 얹었습니다. 이는 상징적인 면에서 그 희생 동물 위에 “자신을 기대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손을 얹는 것을 “사막”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신을 대신하는 그 희생 동물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이 희생에도 속죄의 요소가 있지만, 번제에서 그랬던 것처럼 속죄는 이차적인 목적이었습니다. 화목제의 주목적이 예배자와 하나님 간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손을 희생 동물에 얹는 것은 예배자가 그의 죄를 (특정한 죄를 언급하지는 않음) 대속의 희생에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단계:
희생을 죽임

화목제 의식의 셋째 단계는 대속물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기본적으로 번제와 같았습니다. 대속물에 자신의 손을 얹음으로 예배자는 자신의 죄를 상징적으로 희생제물에 옮겼습니다. 그러나 죄를 구체적으로 특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히브리인이 속죄제와 속건제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구체적으로 특정하고 그를 위해 속죄하지만, 이 화목제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구체적으로 특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예배자가 자신의 희생 동물을 죽이는데, 이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마땅히 자기가 그 값을 치러야 함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예배자에게 있어 이것은 대단히 교육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형벌이 얼마나 가혹한지를 희생 동물의 죽임당하는 고통을 보면서 예배자가 어찌 절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넷째 단계:
제사장이 제단에 피를 뿌림

이제 제사장이 그 피를 제단에 뿌립니다. 히브리어로 “자라크”는 문자적으로 “튀겨서 적시다”라는 뜻입니다. 그 피를 번제단의 기둥에 뿌리는데, 이것은 그 희생이 가진 이차적인 목적 곧 예배자가 저지른 죄의 대속을 위함이었습니다. 모든 동물 희생이 그렇지만 예배자는 죄 사함을 위해 제사장의 역할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다섯 번째 단계:
모든 기름을 제거

화목제의 다섯 번째 단계는 번제와는 다른 첫 번째 단계입니다. 이 희생에는 동물의 몸에 있는 모든 기름을 제거합니다. 모든 기름을 꼼꼼하게 제거해야 했습니다. 레위기 3장 9-10절에 이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그 기름 곧 미골(꼬리뼈)에서 벤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화목제의 기름을 “하나님의 떡” 혹은 “하나님의 음식”으로 불렸습니다. 이 용어는 이 희생에 예배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친히 이 축제에 관여하셔서 그 음식을 받으신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그 축제에 참여하십니다. 레위기 3장 11, 16절과 21장 6, 8, 17절에 그 기름을 하나님의 떡 혹은 하나님의 음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하나님과 사람 간의 축제로 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 간의 교제가 회복됨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증거였습니다. 하나님은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기뻐하십니다. 희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예배자가 잔치 참여가 이루어지고, 기름이 번제단 위에서 향으로 올라가는 이 단계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레위기 3장 17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름을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영원한 규례입니다. 기름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는 속죄를 위해 제단에 뿌려졌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를 통해 많은 상징을 살펴보았습니다. 향은 기도를 상징하고, 기름은 성결을, 소금은 언약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누룩과 꿀은 부패와 발효를 상징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름도 그 의미를 지닙니다. 성경에서 기름은 항상 풍요와 동물의 가장 좋은 부분을 상징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가장 좋은 부분을 그에게 드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첫 열매는 항상 더 좋은 열매였습니다. 창세기 45장 18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 땅의 기름진 것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징적인 면에서 기름은 그 땅의 가장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신명기 32장 15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발견한 후에 하나님을 잊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름은 풍부와 가장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36편 8절에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히브리인이 하나님의 집에서 “살진 것”으로 즐거워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집에서 살진 것으로 즐거워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25장 6절에 다가오는 메시아 나라에 대한 아름다운 예언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여기에서 하늘의 주님이 그날에 풍부한 음식으로 잔치를 준비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풍부”는 히브리어로 “기름”을 의미합니다. 그 잔치는 이 땅에 있는 모든 나라의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이 예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모든 사람을 이끄시는 우주적인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나누려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선지자는 본문에서 “기름진 것”을 영적 실체에 대한 상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1장 17절에서 구원이 유대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이방인에게 온다는 사실에 관해 이와 똑같은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또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헬라어로 ”기름“)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여기서 “감람나무 뿌리”는 유대 나라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에게 구원이 메시아가 탄생하는 유대인을 통해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유대인 최초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뿌리를 통해 주신 구원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구원의 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기름은 풍요와 최상의 것을 상징합니다. 희생 동물에서 제거된 기름은 제단에 두어 여호와께 올라가는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했습니다. 어떤 사람도 이 희생의 기름에 참여하는 특권이 없었습니다. 사무엘상 2장 15절 이하에 비극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는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좋은 대제사장이었지만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들들이 성막 문 앞에서 극악무도한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엘리는 그들의 죄를 알고 있었지만, 책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그와 그 가문에서 제사장직을 제거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저지를 극악한 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죄는 이렇습니다. 화목제에서 기름을 제거한 후 제사장이 종을 보내 제사장에게 속한 고기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기름을 제거하기 전에 그 고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을 취한 가증스러운 일이었으며 통탄할만한 죄였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찬양, 존귀, 예배나 헌신을 사람이 취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피조물로부터 마땅히 받으셔야 할 것을 사람이 빼앗아가는 죄입니다. (말라기 3:8 참조)

여섯 번째 단계:
동물을 참여자별로나눔

여섯 번째 단계에서는 동물을 이 희생제에 참여자들의 사용하는 부분으로 나눕니다. 동물에서 가장 먼저 제거하는 부분은 가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것을 “요제”로 부른다는 점입니다. 레위기 7장 31, 34-36절에서 대제사장에게 이 점을 설명했습니다. 이 부분을 그렇게 부른 이유는 예배자가 손으로 그 동물의 어깨를 붙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은 자기 손을 그 희생제물의 가슴에 얹습니다. 그러면 예배자와 제사장 두 사람이 그것을 제단 앞을 향해 흔든 후 다시 뒤로 가져옵니다. 이렇게 흔드는 것을 두세 번 합니다. 이것은 예배자와 제사장 모두 그 동물의 가슴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사장에게 음식을 주시는 분임을 알고 있으므로 제사장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가 먹습니다.

이런 행동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장에게 공급해 주신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신명기 18장 2절에서 레위인은 이스라엘 나라의 몫(땅)을 받지 못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불로 살라 주님께 바쳐진 희생으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소득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주님이 곧 그들의 소득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3절에서 바울은 이 예를 들어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그 몫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가슴을 흔든 후 그들은 희생 동물의 오른쪽 뒷다리를 잘라냅니다. 그것은 들어 올린 뒷다리라고 불렀습니다. 예배자가 다시 그 다리를 잡고 제사장은 그 손을 그 위에 얹어 그 둘이 함께 하늘로 올렸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놓았습니다. 세 번 그렇게 한 후 그 부분을 화목제를 관장하는 제사장에게 주면, 그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가 그의 소득으로 삼았습니다. 그것을 하늘로 들어 올린 것은 그 동물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나타내주었습니다. 이것은 제사장에게 그 몫을 선물로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가슴을 “흔들고” 뒷다리를 “들어 올리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공급해 주시는 분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주었습니다.

일곱 번째 단계:
나머지 몸의 분배

마지막 단계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화목제 동물 희생의 나머지 부분이 예배자에게 주어집니다. 그 부분은 예배자와 그 가족이 (아내, 아이들, 종, 그의 집이나 문 안에 있는 과부나 고아 포함) 잔치 음식으로 취합니다. 신명기 12장 18절과 16장 11절은 그것이 가족의 잔치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게 되면 하나님과 멀어질 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도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회개하고 집에 돌아오면 온 가족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12장 7절을 보면 이 희생은 여호와 앞에서 먹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과 가족이 성막 뜰 안에서 잔치에 참여하고 그 잔치를 기뻐하도록 했습니다. 성막의 뜰은 이 잔치가 하나님의 집에서 즐거워하는 것임을 나타내줍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너는 ... 네 각 성에서 먹지 말고” 그렇게 하면 잔치를 주관하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 예배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집에서 주관하는 잔치이며 히브리인은 모두 하나님이 초청한 손님으로 참석하는 자입니다.

화목제의 중요한 교훈

이 화목제에서 우리가 배울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 번째 교훈은 화평이 다중적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 가족과의 화평, 이스라엘 공동체와의 화평은 물론 자신과의 화평이 있습니다. 성막 뜰 곧 잔치가 열리는 그 장소에서 배울 수 있는 다른 교훈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이 곧 그의 임재 앞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이 왕의 잔치에 초대될 때 그것은 그가 왕과 좋은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줍니다. 그 사람은 왕과 화평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 앞에서 잔치에 참여하고 즐거워하는 교제입니다.

신명기 12장 18절 말씀입니다.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하나님이 잔치의 주인이고 예배자는 손님입니다. 하나님은 이 희생이 그의 집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거기에 교제가 허락되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과 사람이 기뻐할 의미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예언적인 면에서 화목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다음 과에서는 이 점을 자세히 살펴볼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