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번제 의식

소개

이번 과에서는 전반적인 번제 의식을 살펴본 후 그리스도께서 이 번제의 표징을 어떻게 이루셨는지 설명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이 번제가 어떤 의미를 보여주는지도 살펴볼 것입니다.

먼저 지난 과에서 살펴본 각 의식의 단계를 복습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바치는 단계였습니다. 이 단계에서 예배자는 자신을 하나님께 예물로 바칩니다. “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합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을 대신할 희생 동물을 주님께 바칩니다. 그 순간 이후로 그 동물은 하나님께 속하게 됩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예배자가 자기 손을 동물의 머리에 얹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실제로 자신을 대신하는 희생 동물 “위에 기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면에서 자기 죄를 그에게 옮기는 행위이지만, 문자적으로 죄가 옮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 10장 4절을 보면 황소나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희생 동물에게 죄가 실제로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상징일뿐입니다. 히브리인은 이를 통해 장차 하나님이 죄 문제를 결국에는 해결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예배자가 그의 희생 동물을 죽여야 합니다. 자기의 희생 동물을 죽이는 것은 자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인다는 증거입니다. 또, 이렇게 함으로써 예배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에 대한 심판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번제 의식
네 번째 단계: 피 뿌림

이제 우리는 네 번째 단계를 살펴볼 준비가 되었습니다. 예배자가 관여하는 단계는 세 번째 단계까지입니다. 지금부터 예배자는 자신을 대신하여 그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 의식의 나머지 부분을 관장하는 제사장을 의지해야 합니다. 피를 뿌리는 일은 제사장이 합니다. 피 뿌린다는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자라크’인데 이는 문자적으로 ‘튀겨서 적시다’라는 뜻입니다. 이제 예배자는 자신을 대신하는 희생 동물과 율법에 따라 속죄의 중요한 의식을 행하는 제사장을 의지합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게 손을 얹음으로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죄를 그에게 옮깁니다. 그를 우리의 희생 제물로, 그의 피로 우리를 대속하는 제사장으로 우리는 그를 의지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피 뿌리는 제사장 역할을 완수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는 의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책임이 있음을 영적인 면에서 깨닫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죄를 덮으시기 위한 것이며, 우리 역시 빌라도의 뜰에서 폭도들과 함께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겠나이다”라고 외친 폭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정죄하는데 우리 목소리를 더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극악무도한 우리의 죄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손에 못을 박아 그를 죽이고 그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사람이 바로 우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갈보리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은 실질적인 책임이 우리 죄에 있습니다.

희생 의식에서 피 뿌리는 방식은 그 희생 의식이 대속의 의미를 얼마만큼 지니느냐에 따라 달랐습니다. 어떤 희생들은 지성소의 속죄소 앞에 피를 뿌렸습니다. 그 경우 대속이 그 희생의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용서의 방편으로서 하나님과의 긴밀하고 친밀한 관계가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속죄일에는 피를 지성소 안으로 들고 갔습니다.

번제, 화목제, 속건죄의 경우 대속은 그와 같은 희생에서 부가적이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했던 다른 단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 대속의 개념은 그 희생의 더 중요한 목적 곧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자의 성별된 삶에 자리를 양보했습니다.

피는 성막 뜰에 있는 제단 곧 번제단 아랫부분에 제사장이 뿌렸습니다. 번제 희생이면 이렇듯 번제단 옆에 피를 뿌렸는데, 이것은 대속이 이 희생의 핵심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속죄제와 속죄일에는 피 뿌림이 핵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속이 그 희생의 주목적이고 핵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번제의 경우는 성별이 주된 목적이었고 대속은 이차적인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번제의 경우에는 피를 제단 아래에 뿌렸습니다. 이는 제단 아랫부분 전체에 뿌렸다는 뜻입니다.

제단 위에 피를 뿌리는 이유는 출애굽기 20장 24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제단을 세우라고 지시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모든 곳에서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 여기서 언급한 복은 틀림없이 그들의 죄에 대한 대속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피 뿌림은 대속이 부가적인 목적을 분명하게 나타내 줍니다.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서 피조물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말합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여기서 언급한 너희의 ‘생명’은 영혼을 뜻합니다. 유월절 양을 잡아 그 피를 그들 집의 문설주에 뿌릴 때 이스라엘 자손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출애굽기 12:13). 번제에도 이와 똑같은 개념이 나옵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

다섯 번째 단계:
동물의 가죽을 벗김

피를 뿌린 후 제사장이 희생의 가죽을 벗깁니다. 이는 가죽을 제거한다는 뜻입니다. 가죽을 제거하지 않는 유일한 희생은 붉은 암송아지 희생이었습니다. 암송아지는 번제단 위에서가 아니라 진영 밖에서 희생제로 드립니다. 암송아지는 가죽을 포함해 그 전부가 완전히 불살라지며, 그 재는 정결례에 쓰였습니다.

가죽을 왜 벗기는지에 대한 몇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첫 동물을 죽여 가죽옷을 만드신 것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벌거벗음을 이렇게 덮어주셨습니다. 에덴동산의 사건과 이 희생 사이에 어떤 상징성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가설에 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번제에서 가죽은 죄인에게 주지 않고 번제를 주관하는 제사장에게 주었습니다. 이에 관한 규정이 레위기 7장 8절에 나옵니다. “사람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는 제사장 곧 그 제사장은 그 드린 번제물의 가죽을 자기가 가질 것이며.”

한편,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가 우리를 그의 의로 옷으로 입히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27). 그러나 이것 역시 가죽을 받는 이가 제사장이지 죄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가 똑같은 문제가 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희생 동물의 가죽을 벗기는 것은 그 동물을 제단 위에서 불사르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죽을 벗기면 성막 뜰에서 탈 때 나는 털의 냄새를 없앨 수 있습니다. 만약 털 있는 가죽 채 동물이나 새를 계속 불사르면 털이나 깃털이 타는 냄새가 불쾌할 것이며 거기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좋지 못한 냄새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털이 불에 타면서 나는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가죽을 벗겼다고 믿습니다.

여섯 번째 단계:
희생을 두 부분으로 나눔

여섯 번째 단계에서는 제사장이 희생 제물을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한가운데를 나눕니다. 희생의 반쪽은 왼쪽에 놓고 나머지 반쪽은 오른쪽에 놓습니다. 이것은 셈족이나 히브리인이 언약을 맺는 방식이었습니다. 히브리 두 사람이 땅을 파는 것과 같은 계약을 맺을 때 쌍방이 각자 그 언약의 조건이 충족되는 방식을 확증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에 대한 의식으로 동물을 둘로 나누어 쌍방이 그 두 부분 사이를 실제로 지나갑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상대방에게 이렇게 맹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동물에게 한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옵소서. 만약 내가 이 언약을 깬다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한가운데로 나누어 독수리의 밥이 되게 하소서.”

히브리인은 이런 방식으로 언약에 대한 책임을 졌습니다. 이와 같은 언약의 예가 창세기 15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을 준비가 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5절). 아브라함은 그 언약에 대한 확증을 원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15장에 하나님이 지시하신 동물을 가져다가 한가운데를 나누어 서로 마주 보게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녁 무렵 아브라함이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해가 지고 아브라함이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창세기 15:17-18).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난 횃불은 하나님이 직접 이 언약을 맺는 과정에 개입하신다는 사실의 상징이었습니다.

희생에 요구되는 동물은 붉은 암송아지, 염소, 양, 산비둘기와 집비둘기였습니다 (창세기 15:9). 이런 동물들이 후에 레위기에서도 요구하는 희생 동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희생 동물을 두 부분으로 나누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창세기 15:10). 희생 동물을 둘로 쪼개고 그 사이를 지나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 앞에서 언약을 맺는다는 상징이었습니다.

예레미야 34장 17-21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에서 벗어난 것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그 말씀이 예레미야 34장 17-20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 조각 사이로 지나매 내 앞에 언약을 맺었으나 그 말을 실행하지 아니하여 내 계약을 어긴 그들을 곧 송아지 두 조각 사이로 지난 유다 고관들과 예루살렘 고관들과 내시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내가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며”

이렇듯 언약을 맺는 이 제도는 진지한 책임이 따름을 강조해 주었습니다. 번제 의식에서 희생 동물을 쪼개는 데에 약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 과정은 언약을 맺는 것으로 의식이 이루어집니다. 이 희생에서는 예배자가 이미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에 있는 것이 분명하며, 예배자가 그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배자에게 허락하신 의식으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갱신하는 것입니다. 이 의식에서 예배자가 실제로 쪼갠 희생 동물 사이를 지나지는 않지만, 믿음으로 그 두 부분 사이를 마음속으로 지나면서 하나님과 예배자, 예배자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다시 한번 재확인했습니다.

일곱 번째 단계:
내장과 정강이를 씻음

일곱 번째 단계에서는 제사장이 희생의 몸체에 붙은 핏물을 씻어 제거하는 것입니다. 피는 제단 위에서 불사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는 대속을 위해 제단 위에 뿌렸습니다. 불살라져서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의 향기로운 냄새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였습니다. 모든 피는 대속의 제단에서 드려져야 했습니다. 희생 제물의 몸은 핏물을 제거하기 위해 씻어 하나님께 드리는 정결한 희생으로 불순물이 없게 했습니다. 뿌리는 의식에 쓰이지 않은 모든 피는 진영 밖의 깨끗한 곳으로 가져갔습니다.

여덟 번째 단계:
제단 위에서 희생을 불사름

여덟 번째 단계가 의식의 핵심입니다. 이 마지막 과정은 동물의 몸을 번제단 위에서 희생제로 불사르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나무를 벌려 놓은 후 희생물을 번제로 제단 위에 놓고 불로 살라 여호와 하나님께 드립니다. 물론 예배자는 여전히 의식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헌신하고 경건하게 자신을 그 의식에 몰두시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그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번제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서 번제로 드린 것은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갈보리는 속죄제이지 번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을 계속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 그의 전체 삶이 곧 그의 번제 희생임이 분명합니다.

꺼지지 않는 번제
나라를 위해 계속되는 번제

레위기 6장 8-13절에 계속되는 번제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번제는 개인만 드린 것이 아니라, 국가 단위로도 날마다 드렸습니다. 매일 아침에 번제를 드리고 저녁에도 번제를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번제는 제사장이 드리는데, 레위기 6장에 따르면 그들은 매일 제단 위에서 번제를 드리고 그 불이 꺼지지 않게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레위기 6장 9, 12, 13절에서 하나님은 세 번이나 “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꺼지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와 헌신하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더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거나 성별 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위 구절의 문맥을 보면 하나님은 세 번이나 “그 불이 끊임없이 제단 위에 피워져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그 책임을 알게 하시려는 의도였음을 나타내 줍니다. 거국적으로 끊임없이 번제가 하나님 아버지께 아침마다 올라갈 때 영성 있는 히브리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마음속에서 이렇게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매일 아침 성막 뜰 번제단에서 불에 살라 올라가는 저 번제 희생이 저를 나타내나니, 하나님께서 저의 희생을 기쁘게 받아주소서.” 그리고 저녁 번제에서도 자신의 기도 가운데 그것을 재확인했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번제에는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온 나라를 위해 번제를 바치는데, 그것은 이 희생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고 그들의 헌신을 갱신하는 책임을 계속해서 일깨워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예배의 표현이고 그들이 하나님과 가진 교제의 특권을 일깨워주는 것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유대인은 매일 끊임없이 계속되는 번제 희생을 보면서 그 희생을 자신과 연관시켰을 것입니다.

번제의 희생 의식은 몇 가지 중요한 예외 사항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여기에는 안수가 없었으며 상징적으로 죄가 옮겨지는 것도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거국적인 이 번제는 대속의 부가적인 요소가 제외되었음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대속이 아니라 성별에 중요성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제사장이 바친 동물은 온 나라를 대신하여 바쳐진 것입니다. 제사장은 다른 개인들의 의식 참여 없이 자신들이 이 의식을 진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번제를 멸시하고 거절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사야 1장 11절과 아모스 5장 21절에서 하나님은 그가 제정하신 이 희생에 대해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한다. 멸시한다. 거절한다.” 하나님이 그들의 번제를 거절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번제의 모든 의식이 개인과 온 나라의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 두 구절에서 이스라엘이 외적으로는 의식을 행했지만, 내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다른 신들을 섬기고 헌신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드리는 번제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들이 근본적으로 위선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장 10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널리 퍼진 우상숭배와 부도덕을 “소돔과 고모라” 같다고 하셨습니다. 12절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그리고 그들이 드리는 번제의 위선을 물리치셨습니다. 희생 예물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깊은 헌신을 나타내야 하는데, 그들의 삶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총체적인 무시를 대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번제

이제 우리는 번제에서 표징으로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의 그림자는 신약의 실체와 일치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2절 말씀입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이 구절은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희생의 관계를 “그림자와 실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께 드리는 끊임없는 번제로 묘사한 구절이 신약에 여러 번 나옵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에서 하나님이 예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에 대한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마태복음 17장 5절에 또 나옵니다. “내 기뻐하는 자니.”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이었음을 나타내 줍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헌신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가복음 14:36). 하나님에 대한 이와 같은 성별은 그리스도의 전 생애에 걸쳐 나온 그의 품성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9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사도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이런 뜻입니다. “저 자신을 하나님께 성결하게 하는 것은 사도들도 이처럼 모두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모범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에베소서 5장 1-2절에 자신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 예수님에 대해 바울이 언급한 아름다운 구절이 나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여기 나오는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은 레위기에 나오는 예배의 희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끊임없이 자신을 온전하게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으며, 자신을 위한 어떤 여지를 남기거나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번제는 그의 32년 지상의 삶을 망라합니다. 그렇게 번제를 드리신 후 흠과 티가 없는 속죄 제물로 갈보리 십자가 위에 자신을 올리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제단에 자신을 헌신하는 불이 꺼지지 않게” 하셨으며, 항상 불이 피어있게 만드셨습니다. 매일같이 예수님은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습니다. 히브리서 10장 7절은 시편 40편 6절과 8절의 인용입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그의 열심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 17절에서 제자들은 그에 관해 기록된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는 시편 69편 9절에 히브리어로 쓰인 글을 요한이 인용한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번제 희생의 모든 그림자를 성취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번제단 위에 올려 성별케 하고 향기가 되게 했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꺼지지 않는 불타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으로 반응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함

그리스도인이 끊임없는 번제를 드리고 있습니까? 육체적으로는 아니지만, 영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이 구절은 갈보리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 구원을 위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는 아닙니다.

우리 몸을 드려야 함

로마서 12장 1절에 아름다운 구절이 나옵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 나오는 ‘드린다’에 해당하는 헬라어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향기로운 냄새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번제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영적 행위”에 나타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우리가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희생을 오염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제단 위에 올려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열심의 불을 끊임없이 태워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레위기에 나오는 위대한 번제의 표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