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히브리인이 첫 번째로 가장 중요하게 드렸던 번제를 연구합니다. 이 희생은 그 중요성에 있어서 모세 율법에 나오는 다른 어떤 희생보다도 우선합니다. 이에 관한 의식도 자세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이 희생에서 드리는 동물과 그 의식은 이 번제가 히브리인에게 가르치는 근본적이고 영적인 교훈의 중요성을 강조해 줍니다. 번제는 희생 가운데 “향기로운 냄새”이며 원래 예배적인 희생입니다.
번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올라’입니다. 헬라어로는 ‘홀로코토마’로 번역합니다. 영어의 ‘홀로코스트(holocaust)’가 이 헬라어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홀로코스트’란 완전한 파괴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희생에는 완전히 파괴한다는 뜻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희생은 단지 연기 기둥으로 바뀌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희생은 가장 하나님 중심적이며 온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드려지는 것입니다.
첫 번째 순서이며
가장 중요한 희생인 번제
가장 하나님 중심적인 희생
이것이 제일 중요한 희생인 이유는 가장 하나님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이 희생이 완전히 불에 태워 오로지 하나님을 기쁘게 하도록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드린다는 뜻입니다. 이 희생의 어떤 부분도 다른 이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만 드렸습니다. 이 외의 다른 동물이나 곡물 희생은 희생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도 일부분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번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번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드렸습니다.희생이 소멸하거나 타버리지 않음
히브리인에게 이 희생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이것이 소멸하는 희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장 9절 말씀입니다. “이는 화제(번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이 구절의 히브리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희생의) 전부를 하나님께 올라가는 연기가 되게 할지니라.” 희생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로 바뀌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희생이 제단에서 하늘로 올라가면서 하나님께 향기가 됩니다. 여기서 번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올라’는 하늘로 올라간다는 의미입니다.번제는 하나님께
온전히 성별된 예배자를 상징
희생 동물은 예배자를 대신합니다. 그러므로 그 희생 동물에 벌어지는 모든 일은 곧 예배자에게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 동물이 온전히 성별 되어 그 향기가 하나님께 드려지듯 이 희생을 드리는 히브리인의 마음속으로는 영적으로 이렇게 고백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 동물 희생이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듯 저의 삶도 주님만 기쁘게 하는데 온전히 드리기를 원합니다.” 모세 율법에 나오는 모든 희생은 대속을 위해 바친다는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이는 곧 예배자를 대신하여 바쳐지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희생 동물에게 일어나는 물리적인 일이 영적인 면에서는 예배자 자신에게 일어나야 했던 일이며 그가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제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저의 삶을 온전히 바치기를 원합니다.”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번제의 속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22장 2절 말씀입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제단 위에서 이삭을 바쳐 향기로운 냄새로 하늘에 올라가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전에 번제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번제가 끝난 후 무엇이 남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남는 것은 재밖에 없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배우기를 원한 교훈이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 아이 이삭을 남김없이 나에게 바쳐라. 나는 그 아이의 모든 것을 원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헤브론에 있는 그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의 종과 함께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산 기슭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에 도착하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5절).
아브라함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삭을 하나님께 예물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들에게 그것을 ‘예배’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이 표현이 번제의 예배적인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브라함이 흥미로운 말을 덧붙입니다.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은 그가 이삭을 바쳐도 그 아이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음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2, 15, 22장에서 하나님이 이전에 그와 맺은 언약을 아브라함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장차 큰 후손과 나라의 조상이 될 것인데, 그것은 이 아들 이삭의 씨(후손)를 통해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언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재로 만들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재로 변한 이삭에게도 다시 생명을 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 19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믿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이 사건을 아브라함의 관점에서 바라봅시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 나는 그 아이가 내 것이 되기를 원한다. 나에게 그 아이를 바쳐라. 아무 조건 없이 바쳐라. 그의 전부를 나에게 바쳐라.” 아브라함은 그 요청을 수락했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단 위에 눕힐 때 이삭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겠습니다. 이삭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이해했더라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칼을 들어 아들을 죽여 하늘로 올라가는 향기로 바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를 막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가까운 곳에 그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양을 잡아 이삭을 대신해 제단에 놓았습니다. 이것이 대체입니다. 그 양이 이삭 대신 대속의 희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하나님은 이삭이 무엇을 보기 원하셨을까요? “이삭, 그 양은 너를 대신한다. 그러나 나는 네가 이 사건을 통해 네 책임에서 놓인 것은 아님을 알기를 원한다. 나는 네가 나의 희생이 되기를 원한다. 나는 네가 너의 전 생애를 나에게 바침으로 살아 있는 희생이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세운 제단에서 그 양이 번제로 하나님께 향기가 되어 올라갈 때 이삭이 무엇을 생각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때 이삭은 그 양이 바로 자신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재로 남는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삭이 계속해서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는 살아 있는 희생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양을 바친 곳을 가리켜 여호와이레라고 명명했습니다. 이삭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을 감사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모리아산 사건 이후에도 대속의 희생제물을 주시는 일을 그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를 주셨습니다.
히브리인에게 있어 바로 이 점이 번제가 그들에게 그처럼 깊은 중요성을 주는 분명한 이유입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개념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번제는 너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고 바치고 드리는 기회이다.” 고린도후서 8장 5절은 마게도냐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예수님도 똑같은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을 번제로 비유하는데,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을 드리는 번제였습니다.
히브리 희생의
가장 큰 공통점
가장 하나님 중심이며
깊은 영적 의미가 있는 희생
성결이 대속보다 더 중요함
이런 분명한 이유로 번제는 속죄제에 선행합니다. 지난 과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성결은 대속보다 더 중요합니다. 대속은 성결에 대한 훼손이 있을 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배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헌신과 성결을 실천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인간이 하나님께 드린
가장 오래된 예배
희생 의식과
그 진행 과정
번제 의식과 그 진행 과정은 희생에 담긴 헌신의 단면이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옮겨감을 보여줍니다. 지난 과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각각의 희생에는 독특한 의식이 요구되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단계별로 살펴보면 그 단계들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각 의식의 단계는 히브리인이 배워야 할 깊은 영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럼, 번제의 첫 번째 단계를 다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단계가 있는데, 실제로는 의식을 마치기까지 여덟 단계를 거칩니다. 나머지 네 단계는 다음 과에서 살펴볼 예정입니다. 각각의 단계는 예배자나 제사장이 담당하는 의식이 들어 있습니다. 각각의 의식은 저마다 독특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단계: 예배자가 하나님 앞에 자신과 자신을 대신하는 희생제물을 바칩니다. 이 순간부터 그 동물은 하나님께 속하게 됩니다.
둘째 단계: 예배자가 자기의 한쪽 손을 대속의 희생제물에 얹습니다.
셋째 단계: 예배자가 대속의 희생제물을 죽입니다.
넷째 단계: 제사장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희생제물의 피를 제단 위에 뿌립니다.
첫째 단계: 바침
이제 첫 번째 단계인 바침을 보겠습니다. 영어로 ‘바치다(present)’라는 단어는 명사와 동사로 쓰입니다.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는 행위를 정의할 때는 동사로 쓰입니다. 이 경우 마지막 음절(-sent)에 강세가 놓입니다. 드리는 물건 자체를 가리킬 때는 명사로 쓰입니다. 이 경우 강세는 첫음절(pre-)에 놓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예배자가 자신과 희생 동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단계는 이 의식에서 의도된 것입니다. 예배자가 희생 동물과 함께 히브리의 제단 앞에 나타날 때 그는 자신의 소원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는 이 동물을 저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저 자신도 하나님께 바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속건제를 제외하고는 모든 희생에 적용되는 일반적인 첫 번째 단계입니다.
그 순간 이후로 동물은 하나님께 바친 바 되어 하나님께 속하게 됩니다. 이제 더는 예배자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 희생 동물은 가축의 떼에서 가져왔거나 새장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기 전까지는 그의 소유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바침은 예배자에게 그의 희생을 바칠 때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사실을 실제로 보게 해 주었습니다.
바치고 난 후 예배자가 바로 뒤돌아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의식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식의 나머지 단계들을 통해 히브리인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각 단계별로 옮겨갈 때 예배자가 직접 그 희생에 참여하거나 그를 대신하는 자가 참여하게 됩니다. 예배자는 희생의 영적 의미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집중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로 그의 마음을 헌신합니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온전한 헌신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저 의식이 진행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진행되고 있는 의식에 자신을 온전히 몰두하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 예배자가
희생제물에 한 손을 얹음
둘째 단계: 이제 예배자가 자기의 한 손을 희생제물의 머리에 얹습니다. 이것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이 그 동물을 가져왔거나 자기 소유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을 바치는 순간부터 그 제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손을 희생제물의 머리에 얹는 것은 그것이 자신을 대신한다는 뜻입니다. 손을 얹음으로 자신을 대신하여 이 동물을 지정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특별한 기능이 있습니다. 이것이 피 흘리는 희생의 특징입니다. 예배자 개인적인 손 얹음이나 속죄일에 온 나라를 대신하는 제사장의 손 얹음이 있습니다.
손 얹음(안수)을 통해 그 동물은 이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선택됩니다. 어떤 기능을 수행하도록 지정된 것입니다. 이루어야 할 임무가 주어진 것입니다. 레위기 24장 14절에서 손 얹음에 대한 또 다른 예가 나옵니다.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는 죄를 지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 모독하는 말을 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손을 먼저 그 사람의 머리에 얹습니다. 그런 다음 그 사람들이 먼저 돌로 칩니다. 그러므로 증인들이 그 손을 신성 모독한 사람의 머리에 얹을 때, 그들은 그 죄를 그에게 옮기는 것입니다.
민수기 27장 23절에 손 얹는 또 다른 예가 나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자기 앞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손을 그 위에 얹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지도력을 그에게 옮겨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손을 얹는 세 번째 예는 항상 무언가를 지정하거나 대신해서 이루어져야 할 일이 있음을 나타내줍니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다른 모든 족속의 처음 난 사람들을 대신했습니다. 어느 족속에 속했든지 첫 아이의 아버지는 그 아이를 성막으로 데려옵니다. 그와 동시에 레위 족속의 아들도 데려옵니다.
처음 난 모든 아들들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출애굽기 13:2, 12). 그러나 하나님은 레위 족속을 통해 그를 대체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자기 손을 레위 족속 아이에게 얹으면 그 아이가 그 아버지의 첫 아이를 대신하게 됩니다.
속죄일에는 아론이 자기 손을 아사셀로 불리는 염소의 머리에 얹습니다. 레위기 16장 21절부터 보면, 아론은 그의 손을 염소의 머리에 얹고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와 허물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면에서 그들의 모든 죄를 그 염소에게 옮기는 것입니다. 그 후 그 염소를 진영 밖으로 끌어냅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모든 죄가 상징적인 면에서 이스라엘의 진영 밖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제에서는 예배자가 그 손을 희생의 머리에 얹을 때 상징적인 면에서 자기 죄를 그 동물에게 옮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자의 죄를 위해 그 동물이 그 사람 대신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단계:
대속의 희생을 죽임
의식의 세 번째 단계는 희생제물을 죽이는 것입니다. 대속의 희생을 죽이는 것은 예배자에게 요구되었습니다. 그의 희생제물을 죽임으로 예배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예배자는 자신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양에 죄를 옮기면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깨닫습니다. 예배자가 그 대속의 희생을 죽여야 합니다. 여기서 ‘죽이다’라는 히브리어는 ‘샤하트’입니다. 이것은 희생적인 죽임을 의미합니다. “너는 살인하지 말지니라”에서 나오는 히브리어는 다른 단어 ‘티렛샤’가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이는 것과 대속의 동물을 죽이는 ‘샤하트’는 차이가 있습니다. 서로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쓰인 단어는 희생을 위한 죽임입니다.
예배자에게 자신의 희생제물을 죽이는 것이 요구된 이유는 그 희생제물이 예배자를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자는 그 희생제물의 죽음에 자신의 책임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게 됩니다. 이 동물의 생명이 자신을 대신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배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자각합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대체물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대신할 희생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인이 자신을 대신하는 희생물을 죽이는 과정이 이와 같았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하늘의 형벌을 예배자는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이렇게 말합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에스겔 18:4). 예배자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이렇게 동의하는 셈입니다. “나처럼 죄를 지은 사람은 살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자신의 죄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 이제 이루어졌음을 이렇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히브리인이 자기 죄에 대하여 어떻게 죽을 수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나는 나의 죄를 미워한다. 나는 그 죄를 죽였다. 나는 그 죄를 없애기를 원한다. 나는 죄를 부인한다. 나는 나를 대속하는 희생 가운데 그 죄를 파괴한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를 향해 똑같은 것을 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세례 안에서 자기 죄에 대해 죽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의 죄를 옮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은 여호와 앞에서 자신의 희생제물을 죽였습니다 (레위기 1:5). 그 희생 동물은 사람이 하나님의 법에 반해 지은 죄를 위한 속죄의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성결을 훼손한 것이 우리의 죄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의로운 법은 지켜져야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신을 대신하는 희생제물에 그 손을 얹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합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사도행전 2:23).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받은 것은 우리의 죄입니다 (베드로전서 2:24). 우리가 구속받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죽으심에 우리를 일치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거기에서 이루어집니다.
번제의 기타 의식에 대해서는 다음 과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다음 과에서 우리는 이 희생 의식의 많은 절차가 그리스도에게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고 그것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해 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