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희생에 대하여

소개

희생 제도를 연구하는 목적은 이에 대한 레위기의 적용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를 대충 읽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요구하신 각각의 희생 제도에 별다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각각의 희생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언뜻 비슷하게 보이지만, 매우 독특한 점이 나타납니다. 본 단원을 연구해 보면 그것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각각의 희생과 독특한 의식, 희생 동물, 소제와 관제에 요구되는 재료 등을 연구할 것입니다. 예배와 희생적 대속의 속성에 대한 자세한 정의도 내리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배의 희생과 대속의 희생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에 관한 연구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희생과 모세의 율법 사이에는 명확한 관계가 있습니다. 속죄제와 속건제 사이에도 분명한 율법적 차이가 있습니다.

레위기는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에서 행해진 희생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지 않는 두 가지 예외가 있었습니다. 레위기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기념한 두 가지 큰 희생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을 연구하려면 출애굽기 12장을 보아야 합니다. 레위기에 나오지 않는 두 번째 희생은 붉은 암송아지 희생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민수기 19장에 나옵니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한 다른 희생은 모두 레위기에 나옵니다.

희생에 관한 중요한 교훈
모세 율법에 나오는 희생 제도의 특성

각각의 희생과 그 특징에 대한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한가지는 기억해야 할 것은 희생마다 그 목적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각각의 희생마다 독특한 의식과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희생들이 서로 대체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속죄제는 화목제로 대체할 수 없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각각의 희생은 독특했으며 희생마다 독특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희생의 제물이나 재료는 동물과 식물에서 취합니다. 그리고 희생마다 독특한 희생 제물이 요구되었습니다. 희생이 독특할 뿐만 아니라 각의 희생에 바쳐지는 동물 또한 독특했습니다. 동물 희생에는 항상 피 흘림이 따랐습니다. 그와 같은 대속의 요소는 그 희생속에 들어 있습니다.

피 흘림이 요구되지 않았던 다른 희생도 있습니다. 율법에 따라 히브리인은 각자 들에서 얻은 수확의 첫 열매를 바쳐야 했습니다. 그것은 소제인데 때로는 수확물을 가공해 만든 관제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찬양을 드리기 위한 첫 열매로 바쳤습니다.

예배적 희생

희생마다 필요한 요건이 있었습니다. 예배적 희생은 “향기로운 냄새”의 예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몇 가지 희생에 자주 쓰이는 용어입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개인이 드리는 헌신은 모두 향기로운 냄새의 예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향기로운 냄새의 희생은 번제단에서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올라갑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 기둥 속에서 희생 제물은 향기의 형태로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입니다. 이제 그 희생은 단에서 연기의 모양으로 하나님께 “향기가 되어” 올라갑니다. 희생 제물은 파괴되거나 타버리는 것이 아니라 연기로 바뀌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연기로 하나님께 바로 올라갔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두 가지 독특한 희생이 있습니다. 첫 번째 희생은 예배에 속합니다. 그것은 향기이자 향기로운 냄새의 희생입니다. 희생된 동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자의 전적인 헌신의 표현인 연기로 변하여 하나님께 올라갑니다(레위기 1:9). 그 용어가 의미하듯이 그것은 하나님께 좋은 향기였습니다. 예배 희생 가운데 첫 번째는 번제였습니다. 이를 통해 히브리인은 자신과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성별했습니다. 두 번째 희생은 소제입니다. 이 희생에서 히브리인은 자신이 수확한 첫 열매를 하나님께 성별하고 감사의 표시로 바쳤습니다. 번제를 개인이나 국가 단위로 드렸듯이 소제 역시 개인별로 혹은 국가 단위로 바쳤던 희생이었습니다. 예배 형태의 세 번째 희생은 화목제로 불리는 향기로운 예물입니다. 이것은 개인별 혹은 가족별로 드렸습니다. 이것은 가족 구성원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기뻐하는 가족의 축제이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향기로운 희생은 예배자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이루기 위해 필수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올바르게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경건한 예배는 하나님을 알고 언약의 요구에 따라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습니다. 예배는 자연스럽고 고결한 것이지만, 하나님을 알고 그의 거룩한 속성을 닮아가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입니다.

대속의 희생

다음 희생은 대속의 희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거룩하지 못하고 헌신하지 못했을 때 요구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예배를 드리지 못했을 경우 죄를 범한 것이 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훼손됩니다. 그럴 때 죄인이 드려야 할 첫 번째 희생이 속죄제입니다.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십계명 가운데 처음 다섯 계명 중 하나라도 어겼다면 모세의 율법에 따라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처음 다섯 계명은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훼손했을 때 그 교제를 회복하기에 앞서 속죄제가 요구되었습니다.

속건제는 십계명의 나머지 다섯 계명 곧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명령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이스라엘이 지켜야 하는 또 다른 613개의 규례와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 613개의 율법 조항은 기본적으로 십계명의 확장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어기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훼손될 수 있었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규정한 법을 어긴 경우에는 어긴 사람이 반드시 속건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속죄제는 속건제를 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불가능했습니다. 속죄제는 하나님의 속성에 반해 사람이 죄를 지었을 경우 드렸고 속건제는 하나님의 통치를 위반했을 경우 드리는 것입니다. 속죄제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회복시켰습니다. 속건제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과 화목하게 했습니다. 물론 이것도 사람과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했습니다.세 번째로 큰 대속의 희생은 히브리어로 ‘욤 키푸르’라고 부르는 속죄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나라를 대신하여 대제사장이 홀로 드렸습니다. 이것은 거국적인 희생일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희생이기도 합니다. 욤 키부르 희생은 본 시리즈 마지막 두 과에서 자세하게 설명할 예정입니다.

희생은 사람이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

모세의 율법에 따른 희생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을 위해 사람이 가장 먼저 하는 행동은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사람이 하나님께 선물을 드리려면, 물론 그 이전 족장시대에도 그랬지만, 항상 먼저 제단을 쌓고 나무를 그 위에 벌여 놓은 후 그 나무 위에 희생 제물을 올리고 불을 붙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 희생 예물이 연기로 바뀌어 하늘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사람이 불을 지피는 것은 희생 제물을 위해서입니다. 아벨도 에덴동산 저편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희생”이라는 단어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언어에서는 “희생”이라는 단어가 이차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라는 뜻이었지만, 결핍이나 개인적인 단념, 혹은 자기 부정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에 대한 포기의 의미를 더 많이 갖고 있는듯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에 뭔가 부족함이 있어 자신이 값을 치르고 하나님께 희생을 드린다는 개념을 더한 사람은 아마도 다윗이었을 것입니다. 사무엘하 24장 24절에서 다윗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 개인적인 결핍이라는 개념을 더했습니다. 하지만 희생의 중요한 개념에는 레위기에서 보여주듯이 개인적 결핍이라는 개념은 많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길들인 동물이 희생 제물로 요구됨

모든 희생 제물에는 일정한 요건이 필요했습니다. 일정한 기준을 충족해야 했습니다. 첫 번째 요건은 길들인 가축이라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언약의 희생에 대한 율법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5장 8-17절에 맨 처음 바친 언약의 희생에 대한 개념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요구하신 희생을 드렸습니다. 그 희생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당시 요구되었던 동물은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였습니다 (창세기 15:9). 이 모든 제물은 그 떼로부터 취한 것으로 길들인 가축이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소와 염소와 양은 각각의 떼에서 취한 것입니다. 비둘기도 마찬가지로 그래야 했습니다.

희생 동물을 고르는 요건

희생에 사용된 동물의 첫째 요건은 길들인 것이라야 한다는 점은 이미 언급했습니다. 길들인 동물은 희생을 바치는 사람과 가깝다는 점을 나타내주었습니다. 이는 그 제물들이 사냥이나 몰아서 잡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무리를 떠나 방황하는 동물도 아니었습니다. 난폭하거나 길들이지 않은 동물도 아니었습니다. 주인 없는 동물도 아니었습니다. 야생 동물도 아니었습니다. 게걸스러운 동물도 아니었으며 사자나 독수리 같은 야생 동물도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요건은 정결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동물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는 원하지도 않았는데 억지로 갈보리 십자가로 끌려 온 분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희생 제물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동물들은 그 환경 속에서 불행한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희생 동물은 하나님의 법, 죄, 죄를 위해 생명을 대속으로 바쳐야 한다는 필요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는 자원해서 희생하셨습니다. 그는 희생적 대속에서 자신의 의지에 반해 억지로 끌려 나온 희생자는 아니었습니다.

희생 동물은 길들여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결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순결성을 상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정결한 동물은 “초식동물”이라야 했습니다. 이것은 초식동물의 특성상 채소를 먹는 동물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기를 먹는 육식동물이 희생 제물이 될 수 없었습니다. 사자나 독수리 같은 동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적절하게 나타낼 수 없습니다. 육식동물은 다른 동물의 생명을 헤치며 삽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이의 생명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주셔야 했던 분입니다.

희생 동물은 길들인 것이라야 하며, 초식동물이라야 하고, 정결해야 했습니다.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동물이 흠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점검했습니다. 육체적으로 흠이 없는 동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완전성과 순결성을 상징합니다. 희생 제물로 받아들여지는 흠 없는 제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레위기 22장 20절 이하에서 볼 수 있습니다. 흠으로 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흠이나 상처나 난 동물은 하나님 앞에서 희생 제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제물이었습니다.

수컷이 선호됨 – 힘의 상징

희생 제물로는 일반적으로 수컷 동물이 선호되었습니다. 수컷이 가장 일반적인 희생 제물이었는데 그것은 힘을 상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이 풍요의 상징으로 암컷을 희생으로 바치라고 특정하신 때도 있습니다.

식물, 채소, 곡물과 과실즙

식물이 소제로 하나님께 드릴 때는 채소, 곡물 혹은 곡물로부터 나오는 즙이라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이 먹기에 적당한 음식으로 재배되어야 했습니다. 저절로 자라는 곡물이 아니었습니다. 야생에서 자라거나 산자락에서 자란 것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노동으로 얻은 첫 열매라야 했습니다.

번제에서 사람은 상징적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성결케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드립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소제에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성별하는 것입니다. 성별된 곡물은 가공하지 않은 형태로는 절대로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가루로 만들거나 볶아서 드렸습니다. 일반적으로 케이크나 전 모양으로 만들어 번제단 위에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 희생은 히브리인에게 깊은 영적인 면을 심어주었으며 이런 중요한 의식은 그들의 헌신을 나타내는 기회였습니다.

희생의 중요성

희생들은 그 중요성대로 레위기에 그 순서가 나와 있는듯 합니다. 우리는 희생들이 적절한 순서대로 나온 것을 봅니다. 번제가 속죄제에 선행된다는 점은 놀라운 일입니다. 속죄제가 희생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번제는 예배자가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성별하는 것을 뜻합니다. 속죄제는 성별의 기준을 어겼을 경우 드리는 희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대속의 희생제가 필요하기보다는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성별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예수의 생애가 그러했듯이 성결이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곳에는 대속이 필요 없습니다. 성결이 대속보다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께 온전히 성결하면 그의 삶 속에서 대속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큰 희생은 레위기에 나오는 순서에 따르면 소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언급한 대로 예배자가 원하면 언제라도 드렸습니다. 화목제는 세 번째 큰 희생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예배의 희생입니다. 이 희생들은 대속을 위한 희생에 선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인이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밖에 있다면 향기로운 제물인 예배 희생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속죄제나 속건제를 그들이 저지를 죄를 위해 드려야 했습니다. 죄를 위한 대속의 희생은 예배자가 자신의 삶이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죄책감을 느낄 때면 언제든지 드릴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속건제도 하나님과 사람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 예배자가 어느 때든 드릴 수 있었습니다. 두 희생 모두 유대인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손상되었다고 느낄 때 드릴 수 있었습니다. 속죄일은 온 나라에 걸쳐 일 년에 딱 한 번 지켰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희생의 장소

이 희생들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단은 성막 뜰에 있는 번제단이었습니다. 그곳은 예배자와 희생 제물이 놓이는 곳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신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제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쯔베아’입니다. 그것은 희생 제물을 죽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예배자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면 예외 없이 그 제단에 올려 그것이 ‘연기’나 향이 되어 하늘에 올라가야 합니다. 예배자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하면 예외 없이 자신을 그 제단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대신하는 희생 제물을 그 제단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대속하는 동물의 피는 제단 위에 놓입니다. 모든 희생 제물에서 제거된 지방은 향기로운 냄새로 하나님께 드려져 그 향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소제도 마찬가지로 제단에 올려 그것이 연기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관제는 제단 위에 붓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제단 밑에 부어 여호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물은 이 제단에서 드려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5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반드시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제단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어떤 시도도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단의 크기나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마음의 헌신이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그 제단에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임하여 복을 주리라”(출애굽기 20:24). 신명기 12장 5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찬양의 희생과 대속을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두신 그 제단과 그 성막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규정하셨습니다.

희생 제물을 태우기 위한 특별한 불

제단에 놓인 제물을 태우는 불은 사실상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두 개의 다른 단어로 정의되었습니다. 예배의 희생을 사르는 ‘카타르’라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배의 제물을 하나님께 올라가게 하는 불인데, 히브리어로 ‘카타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드려진 모든 희생을 향기로운 냄새의 희생으로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그 불이 제물을 불사르거나 태운다기보다는 희생의 연기로 변화시켜 하늘로 올라가게 한다고 여겼습니다. 영어의 ‘cauterize(뜸 뜨다)’의 어원이 히브리어 ‘katar(카타르)’에서 나왔습니다. 그것은 “정결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불이 하늘로 올라가는 희생입니다.

이 대속의 희생을 사르는 또 다른 불이 있었습니다. 속죄제와 속죄일에 드리는 일부 희생은 히브리어로 ‘사라프’라고 부르는 불로 태웠습니다. ‘사라프’는 ‘세라핌(스랍 천사)’의 어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를 갚는 자들이었는데,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비처럼 내려 멸망시켰습니다. 그러므로 그 불은 찬양과 헌신 가운데 하나님께 올라가는 불이 아니었습니다. 그 불은 죄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에게서 내려온 불이었습니다. 불은 불이지만 하나님께 바쳐지는 희생을 특징짓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불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세 번째 불은 레위기 10장 1절에 나오는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 드린 ‘이상한 불’일 것입니다. ‘이상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자르’인데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모든 요소, 행동, 사람을 뜻합니다. 사람이 바치는 희생을 위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방법이 있는데, 그 규정을 어기면 예배가 헛될 뿐만 아니라 대속 자체도 헛되고 맙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진노가 규정을 어긴 사람에게 내립니다.

희생 의식

각각의 희생 절차가 독특하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절차에는 깊은 의식이 포함되지만, 그것이 단지 의례적인 의식이나 절차만은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희생을 거룩한 절차로 여기기 쉽습니다. 영적 헌신이 따르지 않는 외적인 희생의 의식도 있습니다. 각각의 희생에 바쳐지는 동물에 특징이 있는 것처럼 각 절차에도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의식들이 특정 부분에서는 서로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희생마다 그 희생에 따르는 핵심적인 개념이 드러납니다. 각 의식의 독특한 면은 각 희생의 독특성을 정의해 주었습니다.

희생을 위한 대속에서 피는 어디에 뿌려질까요? 희생 제물이 하나님께 바쳐질 때 희생 제물의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그 몸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불 속에서 완전히 타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모두 바쳐지는 것일까요? 어떤 희생은 집전하는 제사장이 성막 뜰에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축제처럼 불사를 수 있었습니다. 방황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제사장들의 중재를 하나님은 이렇듯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이런 의식의 진행을 통해 회복을 가져다주는 그들의 역할을 경축해야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희생에서는 저질러진 죄에 대해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리는 분노처럼 불이 희생 제물의 몸을 불살사르기도 했습니다.

희생이 절차적이고 의식적이었지만
깊은 영적 의미가 내포된 장치임

의식이 행해질 때 각의 희생에 들어 있는 깊은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향기로운 냄새의 희생을 드리는 예배자는 어떤 역할을 담당했을까요? 예배자가 자신을 대신하여 제사장이 의식을 집행하도록 자신은 뒤로 물러나기 전에 그가 참여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까지였을까요? 죄인이 속죄제를 드릴 때 그가 할 수 있는 한계와 제사장의 한계는 또 어디까지였을까요? 이 모든 것은 율법 아래 드리는 희생 제도에서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것이 절차적이고 여러 가지 외적 의식을 띠고 있었지만, 히브리 백성의 마음속에 깊은 영적 의미를 부여해 주는 장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