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시험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태복음 4:1)
성경이 기록된 후 수세기 동안은 장절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절의 “그 때에”라는 때를 나타내는 표현은 예수가 세례 받은 후 바로 사십일 금식하고 시험받으셨음을 보여줍니다. 굶주린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고치고, 나환자를 깨끗하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시기 전 마귀는 예수를 무너뜨리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다했습니다. 사탄은 지극히 간교합니다. 자신의 일을 이루기 위해 항상 가장 적당한 시기를 포착합니다. 그는 사람의 “믿음이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 전에 유혹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가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받는 것을 용납하실 뿐만 아니라 시험에 드는 것도 허락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사실은 바로 이런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시험하지는 않으십니다. (약 1:13) 그러나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시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2,3,12).” 사람이 시험을 이겨내면 그 시험이 오히려 유익이 됩니다. “이겨낼 수 있다면”이 아니라 “이겨내면”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은 언제나 사람의 의지에 따라 좌우됩니다. 우리가 시험을 이겨내면 그렇게 한 의지 때문에 더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사탄보다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예수가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실 것을 아시고 처음부터 예수로 하여금 공생애의 맨 처음에 그와 맞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을 마귀는 기뻐했을 것입니다.
예수의 시험은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의 문맥 자체가 그 외에는 다른 해석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되었음을 받아들인다면 마귀의 인격성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은 사탄의 인격성을 보여줍니다. (창 3:1-5, 욥 2:1-2 참조)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첫 조상이 받은 시험에 대하여 언급할 때 예수는 사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만일 몸 안에 악령이 있음을 시인한다면 몸 밖에도 악령이 존재함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또, 다른 악령들보다 더 악한 악령이 있다면 우두머리 악령도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는 그 악령을 가리켜 “귀신들의 왕 바알세불”이라고 불렀습니다. (마귀-devil은 악한 영이며 하나이지만 많은 악령들이 있다. 눅 8:27-29)
화가들이 사탄을 묘사할 때 긴 꼬리에 머리에는 뿔이 달려 있고, 손에는 창을 들고, 어깨에는 사슬이 감겨 있는 괴물로 그립니다. 이것은 잘못된 묘사입니다. 사탄은 절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와에게는 뱀의 모양으로 나타났습니다. 욥에게는 아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예수께 나타난 마귀의 모양이 어떠했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으나 거짓 모양으로 나타난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마 “빛의 천사”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것은 사탄에게 가장 큰 싸움인 까닭에 그가 가진 최고의 전략을 발휘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광야에서 예수가 금식하신 사건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드는 추측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는 예수가 장차 성취해야 할 위업에 대해 명상하실 목적으로 휴식을 취하셨는데 그 임무 때문에 몹시 초조해하셨던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해서 보십시오. 마태는 그가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나갔다고 말합니다. 누가는 “그가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금식하셨으며 이 기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들은 예수가 단순한 사색이나 명상 이상의 중요한 것들에 마음을 두고 계셨음을 보여줍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탄의 세 가지 시험은 그 절정에 불과합니다.
그는 사십일을 금식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십일이 넘도록 금식한 사람의 수가 적지 않으므로 여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 사십일이 다하자 성경은 그가 “주리셨다”라고 합니다. 복음서의 기록은 예수가 그 전까지는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굶주림에서 오는 고통의 정도가 어느 때보다 심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려움, 분노, 슬픔, 근심 같은 큰 위기를 당하면 그 위기가 지날 때까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도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가 인류의 숙적인 마귀와 필사적으로 싸우실 때 이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싸우셨습니다. 진정한 최후의 승리를 인간에게 주시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예수가 아버지의 일에 몰두한 나머지 한동안 식사를 못하신 경우가 이 외에도 여러 번 있습니다. (요 4:3-34, 막 3:20 참조)
하나님의 아들과 사십일 동안 전투를 치른 후 사탄은 잠시 뒤로 물러갔습니다. 누가는 이를 가리켜 “마귀가 얼마동안 떠나니라”고 했습니다. (눅 4:13, NIV “he left him until an opportune time." 더 좋은 기회를 엿보기 위해 잠시 떠났다는 뜻임) 그 후 예수가 잠시 쉬면서 아버지의 명령을 기다리실 때 공복에 의한 극심한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사탄은 다른 모양으로 위장하고 더욱 간교한 방식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치명타를 가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기다리던 순간이었습니다.
때로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정말로 죄를 지을 수 있는가?” 그가 만약 죄를 지을 수 없다면 왜 시험을 받았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만약 시험을 받을 수 있다면 다른 인간처럼 이겨내기 힘든 유혹을 받을 수는 없었을까요?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그가 비록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빌 2:8) 그는 신의 영광을 내려놓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4,15).” 그러므로 예수도 시험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형상과 성품을 타고나신 그는 피곤과 굶주림과 갈증, 추위, 고독, 슬픔과 절망이 무엇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그러나 예수는 죄를 예방할 수 있는 신성을 지니고 계신 반면 우리 인간에게는 그러한 요소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면 다음 말씀을 꼭 기억하십시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은 마귀가 예수께 던진 교활한 시험입니다. “만일”이라는 단어는 마귀가 예수의 신성을 의심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는 마치 한 소년이 친구에게 “네가 할 수 있으면 왜 그것을 하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경우와는 다릅니다. 마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점과 예수 또한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이 항상 가정을 뜻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내가 (만일, if)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하셨지만 그가 십자가형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사탄은 그의 정체를 감출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이란 단어는 그가 예수의 세례 장면에서 성부의 음성을 들은 자 가운데 하나이거나 그 사건을 거기에 참석했던 제삼자를 통해서 들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알리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이 말한 “만일”이 예수의 신성을 공격하기 위해 쓰였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사탄이 의도한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네가 누군지 잘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네가 최근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받은 자임을 알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굶주릴 필요가 전혀 없다. 이 돌에 명령해서 떡이 되게 한 후 너의 식욕을 충족시키라. 그렇게 해도 아무 잘못이 없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네 건강을 돌보고 힘을 얻기를 바라실 것이다.” 분명한 것은 사탄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노골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의 음모가 쉽게 탄로났을지 모릅니다. 사탄은 이런 쪽으로는 너무나 꾀가 많았습니다. 사탄은 정말로 예수가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싶어 했습니다.
만일 예수가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죄가 됩니다. 실제로 그 시험 가운데 회의적인 요소가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유혹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너도 알다시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는 네가 이처럼 오랫동안 음식을 못 먹게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면 지금이야말로 그것을 증명할 때이다.” 마귀는 예수를 유혹하려면 이보다 훨씬 더 교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귀가 예수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을 심어주려 했다고 보는 것이 더 이치에 맞을 것입니다. “그렇다. 너는 마귀와 힘든 싸움을 통과하고 드디어 승리를 거두었구나. 너는 이 승리로 큰 용기를 얻었다. 하나님께서도 이런 아들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겠느냐. 그러나 지금 너는 몹시 지쳐있고 음식이 정말 필요하다. 이제 싸움은 끝났으니 네 아버지께서는 틀림없이 네가 힘을 회복하기를 원하고 계실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로 더 기다릴 필요가 없다.”
예수가 이전의 유혹자를 자신이 또 상대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탄이 이전의 모습으로 오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공정한 방법으로는 승산이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십일 동안 예수의 대적자로 그를 완전히 굴복시키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신이 패한 것처럼 싸움터를 떠났습니다. 그 후 그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위장하고 가장 교활하고 매혹적인 방법으로 예수에게 돌아왔습니다. 예수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을 본 그는 그에게 치명타를 가하기 위해 이 기회를 이용했습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예수가 그의 옛 대적자를 다시 만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하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성령의 검을 칼집에 집어넣지 않고 힘 있게 휘두르셨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신 8:3 참조) 예수는 그의 영이 힘을 얻기 전에 육체의 굶주림을 채우는 것이 잘못임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때까지 예수의 식욕을 만족시켜 주지 않으신 데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생명은 육체적 안락 그 이상입니다. 예수는 육체적으로만 굶주리신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도 시험에 이겼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에 갈급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은 “마귀가 이 모든 시험을 마친 후에” 왔습니다.
첫 번째 싸움에서 극심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여전히 패배를 자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동안 후퇴한 후 모양을 다시 바꾸어 새로운 공격을 가해 왔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려갔습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를 데려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그때까지도 마귀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데려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셨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렇게 믿지는 않으나) 예수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께서 자기의 승리를 인정하시고 다시 힘을 북돋아 주실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성에 도착하자 마귀는 그를 “성전 꼭대기”로 데려갔습니다. 성전의 동쪽에 위치한 솔로몬의 행각이 그 당시 시험받으신 장소라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 꼭대기”에서 그 밑에 있는 계곡까지는 150미터가 넘습니다. 여기서 마귀는 다시 한 번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지극히 간교한 방법으로 예수를 공격했습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이 시험에 나오는 “만일”은 이전 시험에서 말한 “만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는 이와 같은 불신의 요소가 들어 있는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사탄은 그래서 이번에는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시험했습니다. 그는 시편 91:11-12절을 인용했습니다. “기록되었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사탄의 의도는 아마 이렇게 말하려고 한듯합니다. “이미 너는 시험을 받았을 때 네 아버지의 뜻을 순종했다. 너는 너의 대적자(원수)를 정복해 버렸고, 하나님께서는 네가 세례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너의 승리를 만인 앞에서 공인받게 하시려고 너를 예루살렘으로 인도했다. 하나님에 대한 너의 절대적인 신뢰, 그리고 너를 높이려는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가 있으니 이제 비로소 너의 때가 온 것이다. 네가 아는 바와 같이 그는 너를 ‘붙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니 뛰어내려 보아라. 네가 만백성이 주목하는 앞에서 뛰어 땅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다면 무리들이 너를 위대한 영웅으로 환영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너를 그의 아들로 인정하신 사실을 아는 그들은 너를 메시아로 선포할 것이다.” 첫 번째 시험은 불신의 요소가 내포된 반면 두 번째는 과신의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마귀가 먼저 성경말씀을 인용하면서 시험했지만 그것이 예수로 하여금 기록된 성경말씀을 사용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신 6:16 참조) 다시 한 번 예수의 올바른 판단과 성경에 대한 탁월한 지식은 그의 위치를 공고하게 지켜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살펴 주신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고의로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죄가 됩니다. (가끔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독사를 만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만 이런 행위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예수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하나님께서 적당한 시기에 그 사실을 잘 확증해 주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아버지께 이 문제를 조급히 요구하면 죄가 될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탄의 시도가 모두 실패하자 그는 더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만일 성공한다면 그것은 그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보증이지만 실패한다면 그의 최후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천년간 사탄은 이 세상에서 검은 깃발을 휘날렸습니다. 이제 그의 능력을 측정하는 궁극적인 시험이 지금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사탄은 그의 적수를 데리고 유대의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가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판도를 가리켰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이 나라를 통일시키고 세계를 정복할 왕의 출현을 온 나라의 백성이 대망하고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위대한 로마와 그 찬란한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 푸른 지중해를 멀리 가리켰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테네의 아름다운 장관을 보여주었습니다. 북쪽에 위치한 앗시리아의 다메섹, 동쪽의 바벨론, 수산 및 유프라테스 계곡과 페르시아도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남쪽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비옥한 나일강변 및 애굽을 보여주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마귀는 예수에게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었습니다. 실로 그것은 장관이었습니다. 세속적인 야심가라면 자기의 영혼과 맞바꾸는 것도 서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가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오지 않으셨던가요? 분명히 그는 우주적인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사탄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4:9) 예수, 듣는가? 이 모든 것을 너에게 주겠다는 말을…. 네가 상상해 보았을 앞으로 당할 고난, 수치, 잔인한 박해를 감수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다. (눅 4:6) 내가 너한테 바라는 것은 지극히 간단한 수고뿐이다. 엎드려서 나에게 절하고 경배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네 것이 된다.” 이것은 그동안 이 세상을 주관했던 사탄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참으로 대담한 시험이었습니다.
예수가 그의 도전자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셨든지 그가 속지 아니하신 것만은 분명합니다. 사탄이 아니고는 아무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가 없고, 사탄이 아니고는 이처럼 대담한 시험을 할 수도 없음이 명백합니다. 사탄이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한 수법은 예수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피를 뜨겁게 했습니다. 야심이나 자만이 아닌 의로운 분노가 차올랐습니다. 예수는 그 즉시 그에게 돌아서서 그의 위장을 벗겨 버리고 정체를 폭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원수를 향해서 대답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그리고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무기로 삼으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신 6:13).” 그것은 사탄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습니다. 그의 발밑에 디딜 자리를 갈라버렸습니다. 그는 설 자리가 없어져 그 후로 한없이 깊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 사탄의 왕국은 소멸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과정은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왕국이 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계 11:15 참조) 이 싸움에서 패배한 후부터 사탄의 왕국은 그 종언을 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실로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귀가 “이 세상 만국”을 남에게 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예수에게 “이 세상 만국”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면, 그것은 예수에게 유혹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사탄이 누구이며,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 안하는지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진실을 말한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통치자들을 일으키실 수도 있고 넘어지게 하실 수도 있다. 단 4:5 참조). 그 당시의 사악한 왕들과 황제들은 이 사실에 대해 살아있는 증인들이었습니다. 만일 예수가 마귀에게 경배했다면 그의 명성은 틀림없이 높아졌을 것입니다. 백성이 별다른 갈등 없이 그를 세상의 임금으로 떠받들었을 것이라고 믿기 어렵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예수를 억지로 왕으로 추대하려고까지 했습니다(요 6:15). 그러나 예수는 지상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아마 마귀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오늘날까지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귀가 싸움터에서 물러갔을 때, 천사들이 와서 그에게 시중들었습니다(막 1:13). 우리의 제한된 안목으로 보면, 천사들이 예수가 승리할 때까지 초연하게 멀리 떨어져 예수의 시련을 관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좀 이상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이 “홀로 포도즙 틀을 짜도록” 버려두셨습니다. (사 63:3 참조)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의 육체적 영적 굶주림은 이제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보상은 노력에 비례하는 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