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마태복음 1:18)
베들레헴의 큰 별이 떠오르기 전, 온 인류는 하나님과 종교와 자신에 대한 참된 이해를 갖게 해 줄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희랍인은 구세주를 완전한 현인으로 생각했고, 로마인은 이상적인 통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약소민족은 세상을 정복하는 왕이자 이 땅에 정의를 베푸는 자가 구세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의 예언자들에게 구세주는 현인, 통치자, 정복자의 모든 조건을 갖춘 분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구세주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메시아라야 했습니다. 마침내 “때가 차매” 예수는 자기에 대한 모든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오셨습니다. 한 민족만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의 구세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는 온 인류가 고대하던 구세주로 오셔서 세상을 뒤흔들어 놓으셨습니다.
예수의 족보는 두 복음서에 나옵니다. (마 1:1-17, 눅 3:23-38)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쓴 마태는 유대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그의 족보를 시작합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전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누가는 예수부터 시작하여 그의 혈족을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다윗부터 예수의 탄생까지는 이 두 족보가 그 혈통을 서로 달리합니다. 그러나 두 족보 모두 옳습니다. 누가의 족보는 예수가 여인의 약속된 후손이며,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혈통을 엄격히 따지지 않은 마태는 하나님께서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12-13).”는 약속대로 예수가 다윗의 왕위 계승자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 오시는 때가 다니엘서에 이미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흔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광장과 거리가 세워질 것이며 예순두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단 9:24-27) 크루든(Cruden)은 “히브리인들에게는 다음 세 가지 이레가 있다고 합니다. (1) 한 안식일에서 다음 안식일까지의 7일간 (2) 한 안식년에서 다음 안식년까지의 7년간 (3) 한 희년에서 다음 희년까지의 일곱 이레. 그는 다니엘 9:24의 “일흔 이레(weeks)”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여기 나오는 이레는 날이 아니라 해를 의미한다. 한 이레는 히브리 음력으로 7년을 뜻한다. 따라서 일흔 이레는 490년이며, 이처럼 날 수에 따라 해를 계산하는 방식이 성경에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겔 4:4-5 참조)
일흔 이레의 정확한 시작과 끝에 대한 의견은 다양합니다. 크루든은 “느헤미야에게 예루살렘 성벽의 증축을 명령한 아닥사스다 왕 20년부터” 일흔 이레가 시작되었고 예수가 죽을 때에 끝났다는 것이 가장 이치에 맞고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계산에 9,10년의 오차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 2장 1절에 나오는 아닥사스다 왕 20년은 아닥사스다 왕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 전 10년간 그와 정사를 함께 다스린 그의 아버지 때부터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흔 이레의 정확한 시작과 끝에 대한 지나친 독단은 불필요한 논쟁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일흔 이레의 끝이 주후 70년을 넘지 아니하리라는 데 의견을 같이합니다. 그리고 다니엘서에 나오는 기름부음 받은 왕에 대한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이가 예수라는 사실에도 학자들 간에 이의가 없습니다.
메시아는 유다지파에서 나올 것이라는 것도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49장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야곱은 말년에 그 아들들을 불러서 후에 있어날 일을 예언하였습니다.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창 49:1) 장차 오실 이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미가도 메시아가 오실 민족으로 유다를 지목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히브리서 저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히 7:14).”
예수의 탄생 장소를 미가는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구체적으로 예언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이 예언이 그가 탄생할 장소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마 2:4-5).”
예수의 탄생 방법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마태복음 1장에서 우리는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을 봅니다.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여 동침하기 전에 아기가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어떻게 잉태되었는지 우리로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회의론자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을 배척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 그 자체는 신비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암탉이 낳은 달걀을 놓고 수정란인지 아닌지를 맞추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3주후에 부화해 나온 병아리에 대해서는 아무도 그 신비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생물학을 아무리 연구하더라도 생명의 기원과 그 생식작용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생식작용에 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즉, 생명의 번식을 위해서는 암수의 결합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자연법칙이란 사실은 인정합니다. 생식작용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법칙에 예외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예외를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가정할 뿐입니다. 생식(수태)이 일어나려면 양성의 결합이 먼저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예수의 탄생 방법에 대해서는 회의론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했기 때문입니다. 회의론자들은 여기에 반기를 듭니다. “우리는 그런 방법을 본 적이 없다.” 예수의 기적적인 탄생을 부정하는 이유를 종합하면 다음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상 모순이다.”
생명 그 자체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그 신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명을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예수의 처녀 탄생에 의문을 갖는 것은 하나의 가정을 기초로 추론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경험에 모순된다고 그 사실을 배척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의 기원을 경험의 잣대로 추론해 보겠습니다. 이 땅 위의 생명은 반드시 그 기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릅니다. 가장 뛰어난 이론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1) 하나님이 처음에 살아 있는 세포와 번식의 법칙을 만드시고 그 자신은 영원히 뒷자리로 물러서셨다. (2) 최초에 한 세포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다. (3) 최초의 세포가 다른 어느 행성에서 옮겨왔다.
하나님이 최초의 살아 있는 세포를 만드시고 생식작용의 법칙에 따라 번식하게 하셨다면 그가 후에 자신은 영원히 뒷자리로 물러나셨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생식작용을 뛰어넘어 한 사람을 성령으로 잉태시키고 처녀에게서 나게 하실 수 없었을까요? “아니다. 그럴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과 모순된다.”라고 비평가들은 외칩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생물의 기원이 되는 하나의 살아있는 세포를 만드신 일보다 하나님께 더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한 개 이상의 세포를 만드셨다면 과연 몇 개였을까요? 하나님이 아직도 여기저기서 세포를 만들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의 기원이 되는 그 세포 곧 이 땅의 어떤 유기체로부터도 발생한 것이 아니지만 생명체가 번식되는 그 세포를 지금도 찾아 볼 수 있습니까? 이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보다 더 비이성적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가정한다면 우리의 보편적 경험과 얼마나 모순되겠습니까?
맨 처음 아무 원인이나 이유도 없이 세포 하나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다는 주장은 경험뿐만 아니라 모든 이성적 논리에 비춰보아도 모순입니다. 그에 비하면 차라리 시계가 스스로 만들어졌다는 말이 더 쉬울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물체나 맹목적인 힘은 살아있는 세포를 만들지 못합니다. 생명이 다른 어느 행성에서 옮겨왔을 것이라는 생각도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생명의 “기원”에 대해 여전히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것이 생명의 기원을 설명한다 하더라도 그 생명이 다른 행성에서 옮겨와 이 땅에 떨어져 스스로 번식할 수 있었다고 믿는 것은 비합리적입니다. 만일 생명이 이처럼 거대한 공간을 지나 온 것이라면 그 생명체를 운반해 준 매개물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행성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지구에 옮겨진 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여기서 번식할 수 있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 이론이 어떤 논리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것도 우리의 보편적 경험에 비추어볼 때 모순되지 않습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예수의 처녀탄생을 부인하고 생명의 기원에 관한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면 배가 가라앉지 않을까 염려하여 바다 건너편까지 널빤지를 깔아놓고 건너가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이름에 관해 이사야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이 예언을 예수에게 적용시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처녀의 몸에서 나신 예수에게 매우 적절한 칭호입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이시고 성부, 성령과 함께하신 분이라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요한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예수의 생애와 교훈은 항상 그의 속성과 일치했습니다. 하나님을 예수처럼 아름답게 계시해 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이유를 우리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예수를 그저 한 인간으로만 여기는 사람들도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돌보시는 참된 아버지가 되신다는 그의 해석이 만물의 창조주와 통치자에 대한 인간의 개념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선한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에서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말합니다. 이런 동질성은 예수의 다음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오늘날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예수 당시의 유대인 지도자들처럼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유 때문에 그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이 많습니다(요 10:30-31).
성경은 예수의 신성을 자주 언급합니다. 히브리서 1장 8절에 의미 깊은 말씀이 있습니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성경은 그를 창조와 구속의 경륜을 성부와 성령과 함께 실현하시는 분으로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특권을 그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요 1:1-3, 고전 8:6, 골 1:16, 히 1:1-2). 때로 성경은 예수를 하나님보다는 열등한 존재로 언급하는 것도 사실입니다(요 14:28). 예수는 여인의 몸에서 나신 까닭에 “인자(사람의 아들)”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참으로 그와 아버지는 “하나”이시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평강의 왕”은 예수에 대한 또 다른 칭호입니다(사 9:6). 예언서에 나오는 이 표현은 신약성경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더 나아가 베드로는 하나님이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 5:31).”고 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이 목자들에게 그의 탄생을 알릴 때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소리 높여 성부를 찬양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그러나 이 항구적인 평화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삶 속에 “평강의 왕”이 가르치신 원리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절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모든 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예물을 드리리로다(시 72:10~15).”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 2:1~11).” 이 사람들이 왕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왕의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께 절하고 그에게 풍성한 예물을 바친 행위 그 자체가 예언의 성취였음을 아마 모르고 있었던 듯합니다. 다만 그의 별에 이끌려 왔을 뿐입니다. 그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이끌려 왔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경배하리라는 오래 전 예언은 성취되었으며,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땅의 왕들은 계속해서 그를 경배하고 있습니다.
----------------------------------
-
역자 주: 크루든(1701-1770) 성경 색인사전을 편집한 스코틀랜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