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공의
어느 농부가 신문사 편집인에게 원고를 보냈습니다. “나는 일요일에 밭을 갈았습니다. 일요일에 씨를 뿌리고, 일요일에 거름을 주고, 일요일에 추수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요일에 추수한 곡식을 집으로 실고 왔습니다. 내 이웃 농부는 일요일에 교회를 갔어요.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나온 지 아십니까? 9월에 거둔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이웃에 사는 어느 농부보다도 많았습니다.” 편집인은 이 글을 싣어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그러나 그 글에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습니다. “하나님은 9월에 모든 것을 결산하지는 않으십니다.”
이 글을 쓴 농부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참 모습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공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상대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의란 무엇인가?
부더는 하나님의 공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통해 하나님의 우주적인 공정성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이 세상을 완전히 의롭게 다스리시며 모든 사람에게 의무를 부여하신다.” 공의가 때로는 보상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벌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상급이고, 후자는 죄를 짓고 불순종하는 자에게 내리는 벌입니다. 그러나 상을 주시든 벌을 내리시든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일은 언제나 공정합니다.
왜 하나님이 공의로우신가?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온전히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다는 점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와 같은 속성은 그가 온전히 공의로우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로서 그는 항상 무엇이 옳은지 아시는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전능하심은 하나님께서 옳은 일을 행하실 능력이 있음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성경 여러 곳에 나옵니다. 다음은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이사야 45:21) 모세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고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했습니다. (신명기 32:4) 스바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가운데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스바냐 3:5)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이해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장차 죄를 지을지도 모르는 인간을 만드셨나요?” 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정말로 사람을 영원한 지옥에 보낼 수 있나요?” 그런가 하면 개인적으로 큰 불행을 당한 사람들 가운데는 그들의 불행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당한 불행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어요.”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건과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 가운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신명기 29:29)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잘못은 아닙니다. 사람은 그 지식과 지혜에 한계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미적분학 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사야 55:8-9) 다음은 바울의 고백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리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로마서 11:33-34) 사람의 마음에 비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높으신지는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린도전서 1:25) 그러므로 넘어지기 쉽고 유한한 우리가 전지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공의에 의문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지식과 지혜가 부족함 때문이지 하나님의 책임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점을 바울이 자신의 “육체의 가시”라고 불렀던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드렸던 일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면 하나님의 종으로서 틀림없이 더 효과적으로 사역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달랐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고린도후서 12:9) 바울은 자기가 남의 병은 고치면서 자신의 병은 고치지 못하는 것을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가 그로 하여금 “너무 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음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2:7)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먼저 순종할 때 하나님의 공의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때로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공의로우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비가 공의를 무력화시키나?
성경은 하나님의 자비를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9) 그런데 바로 이 구절을 들어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고 사람과 화해하기를 원하시는데 성경에서 지옥을 가르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비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자녀를 영원히 불타는 지옥으로 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이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지옥이 있다는 성경의 교훈을 사실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지만 그의 은혜가 자비와 상충되지는 않습니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비도 인간을 위해 죽음을 당하도록 당신의 아들을 주신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희생은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줍니다. 자비는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공의는 인간의 죄에 대한 대가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속죄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이가 그 대가를 치를 필요가 있었습니다. 다음 구절이 바로 이것을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셨고, 십자가에서 우리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실 때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해 주실 때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거절하면 하나님의 자비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도 우리를 구원할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고 이미 알려주셨으므로 신실한 자에게 영원한 하늘나라의 집을 상으로 주지 않으신다면 공의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무서운 지옥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는 동기를 부여합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옥을 그처럼 무서운 곳으로 만드셨을 것입니다. 영원한 형벌은 없다 라고 배운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지옥이 없으니 그냥 죄를 지으면서 인생을 살겠어.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사람이 죽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은 없거든.” 이처럼 만약 고의로 지은 죄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면 하나님을 섬기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하나님의 공의와 악한 자
공으로우신 하나님께서 왜 악한 사람이 번성하고, 때로는 의로운 사람이 고통 받도록 그냥 두시는지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박국도 같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 선지자가 악한 자들이 왜 벌을 받지 않고 살도록 허락하시는지 하나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유대인을 벌하기 위해 갈대아인을 일으켰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박국이 또 여쭈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갈대아인처럼 악하고 나쁜 사람들을 들어 그 사람들보다 선한 사람들을 벌하십니까? 그 질문에 하나님은 언젠가 결산하는 날이 모두에게 오는데 갈대아인들도 결국에는 그들의 죄 때문에 벌을 받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신문사 편집인이 쓴 주석처럼 “하나님은 9월에 모든 것을 결산하지는 않으십니다.”
다윗도 똑 같은 문제로 고민한 적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니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시편 37:7,9,10) 달란트의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악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 심판 날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 베드로는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심판의 날에 그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7)
토기장이와 그릇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공의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나올 때 왜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는지 묻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그는 하나님의 역할을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와 비유해 설명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토기장이가 자기의 원하는 대로 그릇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따라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지음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 따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그릇으로 쓰셨습니다. 바로가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의 악을 권력을 통해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사람이 그 권세를 휘두를 때가지 기다리시기도 하지만 선한 사람이 나쁜 역할을 하도록 허락하지는 않습니다.
왜 인간이 죄 짓게 그냥 두시나?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에 사람을 두실 때 유혹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하심으로 사람이 죄를 짓지 않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죽음과 고통이 죄 때문에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것을 막지 않으셨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사람의 속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피조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유와 선택할 수 있는 권리에 따라 현명하지 않은 일을 저지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그의 지혜를 따라 억지로가 아니라 우리 마음으로 자원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로 다듬어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만약 우리 인간에게서 선택하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제거된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심판을 하나님께 맡김
종종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으면 그것은 부모를 욕되게 하는 것이에요.” 사랑하는 가족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인간은 관계의 끈을 잘 놓지 못합니다. 자연스럽게 사랑의 관계로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우리가 그의 영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은 공의로우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 관심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이어야 합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랑했던 사람 때문에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꼭 알아야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라도 그들이 생전에 진리를 알았다면 그 진리에 순종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그의 뜻을 모욕하면 자비를 베풀지 않으십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로마서 14:12) 다른 사람의 심판은 우리 하늘 아버지께 맡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