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간은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자신보다 높은 힘을 가진 대상을 경외하는 천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모르고 드리는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받지 않으시는 예배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의 마르스 언덕에서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습니다.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사도행전 17:22,23) 이들이 하나님 앞에 단을 세우긴 했으나 그 신을 알지 못했고 무지한 예배 때문에 그를 기쁘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한번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신 적이 있습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5:7-9) 유대인들이 드린 헛된 예배는 하나님의 계명과 동등하게 그들의 전통을 포함시킨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가리켜 “그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6) 전통이나 관습 그 자체가 나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것을 법으로 만들면 죄가 되고 창조주께 드리는 헛된 예배가 되고 맙니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2:23) 자의적 예배(숭배)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따르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경에서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알지만 나는 오히려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겠어요.” 하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대체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여호와의 법을 어기고 자신의 뜻대로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바칠 때 바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무엘상 13)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에게 속한 모든 것을 죽이라 하셨지만 사울은 아말렉 가축의 일부를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기 위해 남겨두었는데 이것이 바로 자의적 예배입니다. 사무엘이 이를 꾸짖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무엘상 15:2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지시에 반하여 우리의 뜻대로 예배를 드릴 때 받지 않으심이 분명합니다.

무엇이 참된 예배인가?

한번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시다가 수가성 밖에 있는 야곱의 우물에 멈춘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눌 때 여인이 물었습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한복음 4:19,20)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 할 것 없이 예배 드리는 장소는 정말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장소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대답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 드리는 태도가 정말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다음은 예수께서 하신 대답입니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21,23,24)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영과 진리 두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영으로 곧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드려야 하며, 진리로 곧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대로 드려야 합니다. 영으로 예배를 드리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법대로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올바른 방법대로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영으로 드리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영과 진리 두 가지가 다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 영으로 예배 드리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예배 드리는 사람이 기계적인 의식으로 예배를 헛되게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님의 만찬을 떼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묵상하지 않고 다른 생각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입술로는 찬송을 부르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입으로는 기도하지만 실제 마음으로는 기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지를 때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온전한 헌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영으로 예배 드리려면 자신의 온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영적인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태도 역시 올바른 영으로 드리는 예배를 가로막습니다. 누가복음18:9-14에서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두 사람이 나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은 기도를 자랑의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그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리가 자신을 낮추었으므로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의롭다는 자만에 빠져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바쳐 예배 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악을 품은 마음 또한 영적 예배를 방해합니다.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보면 “우리가 우리에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6:12)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미움과 냉소가 가득한 마음으로는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이 회개하지 않은 죄로 넘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예배를 받으시리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배에서 심미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잘못을 저지름으로써 영으로 예배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은 심성적으로 아름다운 음악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곡조의 아름다움에 심취할 때 영적 노래로 드리는 예배가 방해를 받습니다. 사람은 예배의 영적 분위기 안에서 위안을 받습니다. 정작 가장 소망스런 것이 이런 것인데도 불구하고 곡조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면 음악의 감흥 그 자체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결여도 올바른 예배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히브리서 12:28) 경외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깊은 존경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을 밖으로 나타내는 태도입니다. 우리가 죽은 사람 앞에서도 경건한 태도를 취하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부주의한 태도를 취한다면 어찌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로 드리는 예배

만약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에 참석할 수 있다면 그들이 드리는 예배의 단순함에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예배는 오늘날 우리가 예배에 덧붙인 여러 가지 부가적인 것들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드린 예배의 모습이 사도행전 2:42에 나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여기서 사도들의 가르침은 초대 교회 예배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사도들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신약 성경에 갖고 있는 것과 똑 같은 사도들의 교훈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이 달랐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설교와 권면과 성경 읽기(사도들의 가르침에 대한 공부)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 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26) 그러므로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는 방법은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초대 교회는 꾸준하게 떡을 떼는 일 곧 주의 만찬을 시행했습니다. 이것은 예배 드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고 주님의 궁극적인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것입니다. (주의 만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28과 참조)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기도 역시 예배의 중요한 일부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것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7) 물론 기도는 공중 예배에만 국한하지 않고 각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27과 참조)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모일 때 악기 음악이 없는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로새서 3:16) 그는 에베소서에서 이를 다시 반복합니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에베소서 5:19) 노래를 부름으로 우리는 서로 권면(화답)하고 동시에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강조하는 것은 음악의 화음이 아니라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아름다운 음악일수록 마음으로 부르기 쉬운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하지만 곡조를 잘 맞출 수 없다고 해서 노래 부르기를 그만두면 안됩니다. 초대 교회 예배에서 악기가 배제되었던 것은 주님이 기계적인 선율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선율에 더 관심을 두셨기 때문인 듯합니다. 악기는 소리 밖에 내지 못하지만 입술은 예배 드리는 자의 마음을 나타나는 의미 있는 말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제1세기 제자들이 예배를 드릴 때 주님의 일을 위해 재정을 바쳤습니다. 바울이 유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연보를 언급할 때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고린도전서 16:2) 그는 또 이런 말도 덧붙였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린도후서 9:7) 이 두 구절에서 성경적인 연보에 관한 세 가지 원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세가지는 수입에 따라,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즐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 드리는 날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때 예배를 위해 정한 특별한 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매주 첫날로 요한은 이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요한계시록 1:10) 예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날이 주의 첫날이며 이 날을 정해 그를 기념했습니다. 특별히 주의 첫날인 이 날에 그리스도인들이 주의 만찬을 떼기 위해 모였습니다. (사도행전 20:7) 또, 이미 살펴본 대로 이 날 사람들이 수입에 따라 연보를 드렸습니다. (고린도전서 16:2) 주의 날은 매주 첫날로 매주 일곱째 날인 안식일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날 신실하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