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 주변 어느 곳을 살펴보아도 그 분이 계시다는 증거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을 스스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그의 속성을 알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본 과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초월적 존재의 속성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영원하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구원해 내시기 위해 모세를 부르실 때 그가 하나님과 나눈 대화가 출애굽기에 나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애굽기 3:13-14) 그 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출애굽기 6:3) 흔히 사용하지 않는 용어인 “스스로 있는 자”와 “여호와”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의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이는 “스스로 계시는 분” 혹은 “존재하시는 분” 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라는 이름에 하나님의 영원한 속성이 분명히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계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실 분입니다. 그는 시작과 끝이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 오셨을까요? 하나님은 어디에서 오신 분이 아닙니다. 항상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과 장소라는 개념에 익숙해 있어서 이 사실을 인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람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예수께서 야곱의 우물에서 만난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다.” 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24) 영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은 육체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39)
영을 우리가 아는 물질 세계의 용어로는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영을 본적이 없기 때문에 영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요한복음 1:18) 하지만 하나님의 다른 속성들을 공부하면 하나님의 영적 속성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한 하나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모세가 한 말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신명기 6:4) 영어성경에서는 히브리어 “여호와”를 “주”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미국표준번역(ASV)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라고 번역했지만 신명기 4장 35절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주는 하나님이시라. 그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한 분이시지만 하나님께는 세 인격 곧 아버지, 아들, 성령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안에 각각 거하십니다. 아들에 대한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로새서 2:9)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적절한 이름이라기 보다는 그의 신적 속성의 표현입니다. 성경 첫째 절에서 한 분 하나님 안에 복수 인격의 개념이 나타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이 구절에서 히브리어 주어는 복수형인데 동사는 단수로 표시했는데 이는 한 분 안에 복수의 인격이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도 여호와에 대한 같은 개념이 나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한 극단적인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삼신론으로 성경에 성부 성자 성령이 나타나므로 반드시 세 분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단일성과 모순됩니다. 한편 이른 바 “오직 예수”라고 하는 개념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복수의 인격을 부인하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아버지와 아들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3:22, 골로새서 3:1)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은 구분되는 인격이라야 합니다.
배반 당하시던 날 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 될 것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21) 이 간구에서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구분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향해 기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전지하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지식이 무한하다는 뜻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요한일서 3:20)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시편 147:5)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잠언 15:3)
하나님의 지식은 우리 주변의 작고 하찮은 것까지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마태복음 10:29-3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편 139:2-4)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과 필요를 아시며,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동정하시고 관심을 갖는 분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로마서 11:33)
전능하심
성경에서 여호와에 대한 표현 가운데 하나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세기 17:1) 전능하시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능력에 제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6절에 하늘의 한 장면이 나옵니다. 허다한 무리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바로 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기적들도 바로 하나님의 이 전능하신 능력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인하면 이와 같은 기적들을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26)
편재하심
하나님이 영원하시다 함은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는 뜻이고, 전지하시다 함은 그의 지식에 제한이 없다는 뜻이며, 전능하시다 함은 그의 능력에 제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편재하시다 함은 그가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로서는 이런 개념을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예레미야 23:23-24)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다.” (시편 139:7-10)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나 계시니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의 마르스 언덕에서 이교도들에게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사도행전 17:27-28)
불변성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는 속성을 갖고 계십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브리서 13:8)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나 예수가 이 땅에 거니셨을 때나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언약은 바뀌었지만 하나님의 원칙은 영원하고 그의 속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말라기 3:6) 야고보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야고보서 1:17) 다윗은 다음과 같이 찬양합니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편 102:25-27)
신실하심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는 속성은 그의 신실하심을 나타내 줍니다.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약속을 지키신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6:18) 이 구절에서 두 가지 일이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변치 않으시는 분이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그의 신실하심을 의지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그의 신실하심을 보증합니다. 사람들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결정한 것을 그분이 이룰 수 없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로마서 4:20-21)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함을 보증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옳은 것임을 보장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릇된 일은 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지하시기 올바른 것에 대한 지식을 갖고 계십니다.
이 외에도 성경의 많은 구절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히브리서 10:2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데살로니가후서 3:3)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디모데후서 1:12)
하나님의 속성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다윗처럼 다음과 같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시편 139:6) 그렇습니다. 사람의 어떤 말이나 생각으로도 하나님의 속성을 온전히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야말로 진실로 위대한 “스스로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