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순종의 죄
지난 과에서 죄의 특징을 살펴보면서 죄에는 부도덕, 태만,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불순종의 죄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모든 죄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입니다. 부도덕한 사람은 곧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행하지 못했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는 도덕적으로 용인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옳지 않은 죄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모두 도덕적 원리만 일방적으로 적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 엄한 벌을 받은 사건들이 구약에 많이 나옵니다. 바울은 그런 사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고린도전서 10:11) 그러므로 그와 같은 경우들을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악한 도시 고모라를 멸망하실 때 유일하게 구원받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가족입니다. 하나님께서 롯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창세기 19:17) 그들이 그 성을 떠나 도망할 때 하나님께서 불과 유황을 비처럼 그 성에 퍼부으셨습니다. 그때 롯의 부인이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즉시로 소금기둥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행동 가운데 도덕적인 잘못이 없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생명을 잃었습니다.
열왕기상 13장에는 이스라엘 여로보암 왕에게 가서 우상숭배를 경고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보냄을 받은 한 젊은 선지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받았습니다.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말라.” (열왕기상 13:9) 이 젊은 선지자에게 왕이 자기 집으로 함께 가자 했으나 그때는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나이 많은 선지자에게 꾀임을 받아 저녁식사 자리에 갔습니다. 그 젊은 선지자는 초대받은 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떠난 후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나이 많은 선지자와 식사한 것이 도덕적 잘못은 전혀 아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결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에 대한 위험성이 사도들이 쓴 글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음은 바울이 갈라디아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 1:6-8) 이 저주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에 무엇을 더하거나 뺌으로 그것을 다른 복음이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대로 말하지 않으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침묵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침묵하지 않으면 그것 또한 우리가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요한이 한 경고를 들어보십시오. “지나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요한이서 1:9)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에 우리가 무엇을 더하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교훈을 “지나쳐” 너무 멀리 가는 행위가 되고 맙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분열이 더 많습니다. 성경이 기록된 말씀 밖으로 우리가 넘어가지 말라고 금지했으므로 성경이 침묵할 때에 우리도 침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원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변경 없이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 순종의 방법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다면 그 순종의 방법은 사람의 판단에 맡길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의 근본을 변경할 수는 없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예들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물로 세상을 멸망시키기로 하셨을 때 의인 노아와 그의 가족은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시고 구체적으로 그 크기와 층수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재료로 고페르 나무를 쓰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창세기 6:14, 역자 주: 개역한글판에서는 잣나무로 번역함) 이 명령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을 보면 노아는 고페르 나무를 쓰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에서 보면 고페르 나무 대신 참나무, 히코리 나무, 단풍 나무 같은 다른 나무로 대체하는 것을 그에게 금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노아에게 “참나무나 히코리 나무나 단풍나무는 쓰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노아에게 어떤 재료를 쓰라 하셨을 때 그 나무 대신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잘못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노아가 다른 나무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성경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 (창세기 6:22) 물론 하나님께서 세세한 것까지 다 지시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틀림없이 연장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는 부수적인 것이었습니다. 연장을 사용하여 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노아가 고페르 나무 대신 다른 나무로 대체했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변경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아람 왕의 군대 장관으로 나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이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그에게 나병에서 고침을 받고 싶다면 요단 강에서 몸을 일곱 번 담그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나아만이 그 지시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다메섹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 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열왕기하 5:12) 여기서 엘리사는 나아만이 언급한 강에 가서 담그면 안 된다고 말하진 않았습니다. 만약 나아만이 다른 강에 가서 몸을 담갔다면 나병에서 고침 받지 못했음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지자의 명령을 변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명령은 단지 “요단강에서 네 몸을 일곱 번 담그라”이었지만, 그 명령에는 “고침 받기 위해 다른 강에 가서 네 몸을 담그지 말아라.”는 명령까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대사명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가복음 16:15) 이 명령에서 사도들은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전파할 것이 복음이라는 구체적인 지시도 받았습니다. “정치나 경제를 전파하지 말아라.” 이런 명령을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선포하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복음을 전파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러면 안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그들이 왜 정치를 전파하지 않았을까요? 사도들은 무엇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 복음 외에 다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금지되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명령에는 복음이 포함되어 있고 정치는 배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데에는 부수적으로 따르는 것이 많습니다. 길 모퉁이서, 교회 건물에서 혹은 라디오를 통해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은 것들은 사람의 판단에 맡겼습니다. 만약 우리가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이용한다면 주님의 그 명령을 이행하는 수단으로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 대신 정치를 전한다면 명령의 본질을 변경하는 것입니다.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보면 세례에 물 속에 잠기는 행위가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로마서 6:4) 이 구절에서 바울은 “물을 뿌리지 말아라.”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가 세례를 장사 지내는 것으로 표현할 때 우리가 머리에 물을 뿌리거나 붓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을 배제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흐르는 물, 따뜻한 물, 차가운 물에서 세례를 받을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겼습니다. 어떤 물에서 받든지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 속에 잠기는 장사를 물 뿌림으로 대체한다면 그 명령을 변경하는 것입니다.
똑 같은 원리를 주님의 만찬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 기념 식탁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몸의 상징으로 떡을 주시고,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당신의 피의 상징으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는 주의 만찬 재료를 떡과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만찬에서 떡 대신 닭고기를,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 대신 오렌지 주스로 대체하면, 주님께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그의 명령을 변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 모일 때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바울은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에베소서 5:19)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찬양을 시(psalms), 찬송(hymns), 신령한 노래 (spiritual songs) 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의 노래나 애국가를 부르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지만 이와 같은 노래들은 예배 시 배제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 시 불러야 할 노래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었기 때문입니다.
똑 같은 원리를 들어 어떤 종류의 음악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골로새서 3:16) 여기서 언급한 음악은 노래 부름 (singing) 곧 육성 음악 (vocal music) 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주제와 연관된 교훈을 가르칠 때 나오는 모든 말씀을 보아도 똑같습니다. 예배 시 악기 사용을 금지한 구절이 없지만,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복음을 전파해야 하고 주의 만찬 시 오렌지 주스로 대체할 수 없다는 똑 같은 원리를 적용하면 악기사용은 배제됩니다. 이에 대한 명령이 주어졌고, 우리는 주님께서 지시하신 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자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에 악기를 더하는 것은 명령 자체에 대한 변경입니다. 성경에서 단순히 “음악하라 (make music).” 했다면 어떤 종류의 음악을 사용할지는 사람의 판단에 맡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은 “노래하라 (to sing)” 이므로 어떤 음악인지가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노래를 부르라는 명령에 부수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모든 노래에는 곡조가 필요합니다. 이 곡조를 우리가 외워서 불러야 하는지 악보를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노래를 부를 때 도움이 되는 악보 사용은 노래를 부르라는 명령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악보를 보지만 부르는 노래는 육성음악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어떤 행위를 받으실지 그러지 않으실 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안전한 편을 택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