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新生)

대인 지도자가 한번은 예수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곧 그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수적인 태어남이라면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하므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거듭남 혹은 신생이라 하는데 요한복음 3:1-3에 나옵니다. 거듭남에 대해 살펴보시기 전 이 구절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1-3)

거듭남의 특징

니고데모가 예수의 답변을 듣고 마음 속에 가졌던 의문은 사람이 어떻게 육체적으로 두 번 태어날 수 있느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말씀하실 때 그것은 육체적 두 번째 탄생이 아니라 영적인 탄생임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탄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육체적인 탄생이 우리 인간 관계를 결정하듯이 영적 탄생이 우리의 영적 관계를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한번에 이루어집니다. 물로 한번, 그리고 성령으로 또 한번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물과 성령이 관여하는 한번의 탄생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체적 탄생을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필요하듯 영적 탄생을 위해서도 물과 성령이 관여한다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쉽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없이는 사람이 태어날 수 없듯이 물과 성령 없이 사람이 영적으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에서 영어로 이것을 옮길 때 “비겟(beget)”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아버지가 자식을 “낳다” 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또, “본(born)”으로도 번역했는데 이 단어 또한 “낳다”라는 뜻을 가진 “베어(bear)”의 과거분사입니다. 이 단어는 어머니가 자식을 “낳다” 라는 표현에 쓰였습니다. 문자적으로는 두 단어 모두 “가져오다” 혹은 “산출하다” 라는 뜻이지만 아버지가 자식을 낳다 라고 할 때는 “비겟(beget)”을 사용했습니다. (마태복음 1:2) 그러나 어머니가 자식을 낳다 라는 뜻으로 쓰일 때는 “본(born)”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1:11) 그럼, 성령과 물의 역할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의 역할

간단히 말해 성령으로 나는 것은 내적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뿌려지고 그 말씀을 믿을 때 생깁니다. 탄생에는 씨 뿌림(잉태)과 출산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1) 씨 뿌림(잉태)과 (2) 출산은 동물과 식물 세계에 필요하며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낳았다 라고 했습니다. 다음 구절들을 참고하십시오.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요한일서 4:7)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한일서 5:1)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12-13)
이 잉태는 씨를 심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후 이 씨가 자라 새로운 생명체로 나오는(낳는) 것입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1:22, 23, 25)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 곧 썩지 않을 씨를 통해 낳았다고 한 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야고보서 1:18) 다음은 씨 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하신 예수의 말씀입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누가복음 8:11) 지금까지 살펴본 성경구절을 통해 씨가 우리 마음 속에 뿌려지고 발아될 때 다시 말하면 복음이 전파되어 믿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낳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언제 우리에게 들어오실까요? 성령은 씨 뿌리는 역할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 보혜사 곧 하나님의 성령을 그들에게 보내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26)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한복음 16:13) 그러므로 성령의 역할은 사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주의 대리자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신약성경을 쓸 때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습니다. 또, 성령의 감동으로 그들의 교훈을 사람이 믿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성령으로 씨 뿌림(잉태)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씨가 성령으로 사람의 마음에 뿌려질 때 거듭남을 위한 성령의 역할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육체적 탄생과 영적 탄생은 차이가 있습니다. 육체적 탄생은 태어나는 사람의 의지와 상관이 없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씨 뿌림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복음을 믿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1:21) 이것은 말씀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으면 씨 뿌림(잉태)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고 부릅니다. (요한일서 5:1)
성령의 역사에 의한 씨 뿌림(잉태)은 내적 변화입니다. 이 내적 변화는 회개로 나타납니다. 회개란 마음과 행동을 바꾸는 것으로 구원에 필요합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누가복음 13:3) 참된 회개를 한 사람은 그리스도께 돌아온 후로는 변화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난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에베소서 5:9) 이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살펴볼 예정입니다.

물의 역할

사람이 살아 있는 생명체로 태어나기 전에 육체적으로 잉태되는 일이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아직 영적으로 태어나기 전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영적으로 잉태되는 것이 가능합니다.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려면 물과 성령이 모두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작용으로 잉태함을 받듯이 물을 통해 낳음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물은 상징적인 것으로서 말씀을 뜻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물로 낳아야 한다 라는 구절은 말씀으로 낳아야 한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이 불가능한 이유가 있습니다. 물과 성령 이 둘을 모두 문자적으로 이해하든지 아니면 상징적으로 이해하든지 해야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물이 말씀이라면 성령을 성령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여기서 언급하는 성령은 문자 그대로 성령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물 또한 문자 그대로 물로 이해해야지 다른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물이 중요하게 쓰인 예는 세례밖에 없습니다. 다음 성경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베드로전서 3:20-21.)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사도행전 8:38.) 그러므로 물로 낳는 것은 물에서 세례 받는 것입니다.  
물을 어떻게 세례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육체적 탄생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자기보다 작은 곳에서 태어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탄생에서도 우리가 태어나는 곳이 우리보다 커야 합니다. 그렇다면 물 가운데 완전히 잠기는 세례를 통해서만 사람이 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머리 위에 뿌리거나 붓는 약간의 물은 너무 적어 물로 태어나는 표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물 세례가 장사 지냄을 의미하는 다음 구절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로마서 6:4)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골로새서 2:12) 여기서 장사란 물 가운데 완전히 잠기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탄생과 장사 이 두 가지 모두 물 가운데 완전히 잠기는 것이라는 점을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거듭남이 필요한가?

예수께서는 거듭남(신생)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내가 네게 (반드시)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요한복음 3:3,5,7) 영어 성경을 보면 아무도(no one), 반드시(must) 라는 단어로 필수적이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예수께서 “진실로 진실로” 강조하신 말씀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거듭남이 성령의 감동으로 전해진 말씀을 믿고 물 가운데 세례를 받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믿음과 세례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지므로 (마태복음 19:23-25) 믿음과 세례는 죄로부터 구원받는데 필수적입니다. 구원에 믿음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누구다 인정하지만 세례도 필요하다고 말하면 부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음 성경구절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마가복음 16:16) 이 말씀은 세례를 믿음과 구원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베드로전서 3:21, 역자 주: 영어성경 NIV에 나오는 “This water symbolizes baptism that now saves you also.” 이 구절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물은 세례의 표시인데 이것이 이제 너희를 구원하느니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사도행전 2:38, 역자 주: 영어성경 NIV에 나오는 “Repent and be baptized, every one of you, in the name of Jesus Christ for the forgiveness of your sins.” 이 구절을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각각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 죄 사함을 위한 세례를 받으라.”)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사도행전 22:16) 이렇듯 죄를 씻고 구원받는 것이 구원에 필요하므로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물이 우리의 구세주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그러나 오직 물과 성령으로만 우리가 구원이 있는 그리스도에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물과 성령 모두 거듭남에 필요합니다.

거듭남이 신비적인가?

요한복음 3장 8절 말씀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실 때 신비로운 방법으로 우리가 거듭나고, 성령이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말씀해 주신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아홉 번의 개종사건을 보면 어떤 경우에도 신비로운 “체험”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생각은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의 말씀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 대답이 바로 그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난 사람을 바람과 비교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람을 볼 수 없지만 바람이 하는 일은 압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사람의 외모 변화는 볼 수 없지만 거듭난 사람의 행동, 말, 삶은 달라집니다. 이것은 변화지만 우리 눈으로 바람을 볼 수 없듯이 거듭난 사람의 변화도 볼 수 없습니다. 변화는 삶의 방식의 변화이지 육체적으로 나타나는 외모의 변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