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기적들
성경은 특별한 책입니다. 그 안에 있는 도덕적 교훈 때문만이 아니라 거기 기록된 특별한 기적들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기적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이에 대한 올바른 정의부터 내리고 시작하겠습니다.
그리스어 신약성경에 쓰인 두 단어가 성경에 기적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한글성경에는 주로 이적으로 번역함) 한 단어는 “권능의 행위” 라는 뜻을 갖고 있고, 다른 단어는 “표적(표징)”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이란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내는 표적(sign)으로 그의 특별한 권능의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사롭지 않은 일이나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을 기적으로 잘못 적용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기적이란 우주의 자연법칙이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 저지되고 자연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초고층 빌딩에서 야구공을 떨어드렸는데 그것이 아래로 떨어지는 대신 위로 올라간다면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중력의 법칙에 따라 원래 아래로 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6개월 밖에 살 수 없다고 진단 받은 환자가 조금씩 건강을 회복했다면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회복이 초자연적 방법이 아니라 자연적 방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환자가 어떻게 병을 회복할 수 있었는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다 하더라도 기적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자연법칙을 역행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의론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이 상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오랜 세월을 두고 성경을 공격했습니다. 여기서 그에 대한 반론을 충분히 전개하기에는 지면의 한계가 있으나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일반적인 자연법칙을 뛰어넘는 기적을 인정하는 것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가능한 하나님께는 죽은 사람을 일으키는 일이 사람을 자연 출산과정을 통해 태어나게 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출산이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나 모두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자연 출산의 과정은 인정하면서도 죽은 사람을 살린 기적은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자의 현상은 익히 보았지만 후자의 현상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 곧 기적이 가능함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을 자연현상으로 설명하려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을 이용해 그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재앙 중에는 단순한 자연현상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연현상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적절한 때에 나타나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보낸 것입니다. 다음 성경 말씀에서 그 점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물론 바울의 이 말이 기적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지만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이 단순한 자연현상이라고 주장하는 근저에는 불신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사건을 가리켜 음식의 자연증가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성경이 기적을 분명히 말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구약은 만물의 창조를 비롯해 많은 기적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최초의 사람을 지으신 일도 기적을 통해서입니다. (창세기 2)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도 다음과 같은 여러 기적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넘 (출애굽기 14장),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심 (출애굽기 16), 여리고 성이 무너짐 (여호수아 6), 죽은 두 아이를 살림 (열왕기상 17, 열왕기하 4).
성경의 기적은 대부분 신약에 나옵니다. 신약시대의 기적은 주로 예수께서 행하셨지만 더러는 사도들이나 다른 그리스도인들도 행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과 (요한복음 2)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은 (마태복음 14) 예수께서 자연의 힘을 제어하신 기적들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 가운데 병자를 고치신 기적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적을 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는 다음과 같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1) 예수는 명성을 얻기 위해 기적을 행하신 적이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병 나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마태복음 8:4)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마태복음 9:30)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 병 고치는 사람들은 할 수만 있으면 그 사실을 널리 알리려고 시도합니다.
(2)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모든 병을 다 고쳤습니다. 열두 제자를 보내실 때 그런 권능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마태복음 10:1) 성경은 사도들이 병 고친 기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사도행전 5:16) 이것은 오늘날 병 고치는 사람들이 기질적인 환자는 병 고치는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납니다.
(3) 예수께서는 환자의 믿음을 병 고침의 절대적인 조건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병 고치신 기적이 31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병자의 믿음을 요구하신 적이 한번 있습니다. 그러나 15번의 병 고침에는 믿음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9번은 믿음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한 사람에게 믿음이 있었으나 병 고침의 조건으로 요구하지는 않으셨습니다. 4번은 믿음을 갖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나기 전 이미 죽었으므로 믿음을 갖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 병 고치는 사람들은 병 고침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한결같이 그들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4) 예수는 병의 일부만 고치신 적이 결코 없습니다. 눈 못 보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듣지 못하는 사람이 완전하게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병이 단순히 호전되거나 몇 주 후에 재발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병 고치는 사람들은 종종 완전하게 고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수 주 후에는 원래의 병 상태로 되돌아오기도 합니다.
(5) 예수께서는 즉시로 병을 고치셨습니다. 병자를 만지어 고치시거나 말씀 한마디로 즉시 낫게 하셨습니다. 다음은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마태복음 9:6) 그러자 그 병자가 즉시로 일어났습니다. 시간을 두고 조금씩 호전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시간을 두고 조금씩 호전된다면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적이란 자연법칙을 초월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점진적 호전은 자연법칙을 역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점진적 호전은 기도의 응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야고보서 5:16)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병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 결과로 병의 회복이 점진적으로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모세가 이집트로 돌아와 기적의 능력을 보여주자 바로 왕의 마술사들도 모세가 행한 그런 기적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비슷한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지만 마술사들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거짓 기적 행하는 자들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마태복음 24:24) 계속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2-23)
그러므로 사기꾼이 아닌지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요한일서 4:1) 모세 율법 아래서는 하나님의 일군인지 아닌지 분간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교리를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교훈이 잘못된 것이라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신명기 13:1-5)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신약의 교훈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거절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성경시대에 일어난 기적들을 지금도 행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기적적인 능력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능력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의 선물을 빌립이 전도한 사마리아의 개종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사도행전 8:18)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오직 사도들만 이와 같은 은사를 받게 해 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사도의 죽음을 끝으로 그와 같은 기적이 끝나게 됨을 의미합니다. 바울도 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아홉 가지 성령의 은사를 열거하면서 한 말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린도전서 12:31) 그는 사랑이 어떤 은사보다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고린도전서 13:8, 10) 바울이 아홉 가지 은사를 열거한 후 온전한 것이 올 때는 기적적인 은사가 그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온전한 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이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어로 “온전한 것”은 중성이므로 그리스도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리스어로 “온전한 것”의 어원을 살펴보면 “최종 단계로 인도, 마침, 온전하여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음” 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Thayer, Greek-English Lexicon, p. 618)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가 신약이라는 기록된 말씀의 형태를 갖춰 최종적으로 온전하게 이루어질 시기를 마음에 두고 그 말을 했음이 분명한 듯 합니다. 실제로 야고보는 이 계시를 가리켜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법”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1:25) 하나님의 계시가 “마지막 단계까지 완성되었을 때” 권위의 증거로 주어진 성령의 은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 목적이 달성되었으므로 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