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속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 처형입니다. 그 이야기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에게 나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기 때문입니다. 이 “속죄”라는 개념이 신약에 많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 죄를 갚아주신 사건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지은 후부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이 죄는 개인적인 것이지 유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원죄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만약 우리가 아담의 죄를 유전 받는다면 위 구절을 다음과 같이 고쳐 써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태어났으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죄의 결과인 하나님의 영광에 “모자르다 (come short)” 혹은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다 (fall short)” 라고 번역했는데 이것은 유전 받은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행동의 결과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죄의 결과로 육체적 죽음과 영적 죽음이 왔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여기서 육체적 죽음은 아무도 피할 수 없으며, 영적인 죽음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극복할 방법이 없습니다. 영적 죽음은 하나님과 영원히 떨어져 죄의 형벌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군가 죄의 값을 치를 때 정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받고 영원한 천국 집에 들어가려면 속죄가 필요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9:22) 하나님께서는 죄 용서를 위해 피 흘리는 희생을 항상 요구하셨습니다. 모세의 율법 아래서는 매년 하루가 속죄일로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날 대제사장이 자기 몸을 씻고 거룩한 세마포 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염소 두 마리와 어린 양 한 마리를 자신과 백성을 위한 속죄 제물로 취합니다. 먼저 어린 양을 죽여 자신과 백성의 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염소 한 마리는 주님 앞에 산 채로 드리는데 대제사장이 그 염소 위에 손을 얻어 백성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 후 그 염소를 백성의 죄를 지어 광야로 떠나 보냅니다. 다른 염소는 잡아서 일년에 한번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들어가는 지성소의 속죄소와 제단에 뿌립니다. 이렇게 해서 백성의 죄를 덮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속죄 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덮개, 덮음, 덮기 위함” 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실제로 죄를 용서한다는 뜻이 아니라 완전한 희생 제사가 드려져 그들의 죄를 없앨 때까지 죄를 덮어둔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방금 살펴본 대로 아무리 좋은 동물로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린다 해도 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제사는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희생제사는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히브리서 10:3-4) 그러므로 이 제사들이 죄를 없이 하지는 못했지만 죄를 생각나게 해주는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제사는 온전한 희생제사가 바쳐질 때까지 이와 같은 목적으로 시행되었던 것입니다.
죄를 완전하게 없애는 온전한 희생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었습니다. 그의 온전하심은 30 여 년의 지상생활에서도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15) 이와 같은 희생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다음 성경구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6-8) 그리스도의 죽음이 왜 그렇게도 중요했는지는 우리를 위한 그의 희생과 연관된 다음 성경 용어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구약 율법의 희생제도는 새 언약 아래 있을 희생제도의 견본이었습니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동물 희생제사를 백성들의 죄를 위해 드렸듯이 신약 아래서 우리 대제사장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완전한 희생을 드리셨습니다. 그러나 모세 율법에서 드린 희생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희생은 매번 반복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완전한 희생제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브리서 9:26) 히브리서 9장을 살펴보면 옛 언약 아래서의 제사와 새 언약 아래서의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희생을 정말 잘 비교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속량의 동의어가 구속입니다. 재산을 저당 잡혔다가 나중에 값을 치르고 저당을 해제하는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이를 가리켜 되 산다(구속) 라고 합니다. 저당 잡힌 사람이 값을 치를 수 없으면 누군가 대신 값을 지불하고 다시 사서 저당 잡힌 사람에게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영적인 면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저당 잡혔습니다. 아무리 선한 삶을 산다고 해도 그 저당을 해제할 수 없으며 구속을 위한 대가를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 곧 되사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1:7)
이는 곧 우리 자신의 선한 행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에베소서 2:8-9)
속죄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공로로 구원받을 수 없으니 죄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떤 면에서는 옳은 말입니다. 우리 자신의 선행으로는 구원을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비록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희생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자신에게 적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조건적이거나 아니면 무조건적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조건이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에 나아가기 위해 사람이 취해야 할 길을 제공해 줍니다. 그 첫째 조건이 믿음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간수에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 16:31) 여기서 바울이 말한 믿음이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단지 마음으로 인식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는 간수에게 그리스도를 믿으라 곧 그를 의지하라 했습니다. 그와 같은 믿음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해 줍니다. (로마서 10:9-10 참조) 간수의 믿음은 또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도록 인도했습니다. 간수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지 않았다면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듯 구원 얻는 믿음에는 순종이 들어 있습니다.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히브리서 5:9)
그렇다면 죄인에게 요구되는 순종이 무엇이겠습니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사도행전 2:38) 회개와 물 속에서 받는 세례는 죄 사함의 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에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따라야 할 조건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은 그리스도의 피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그 피에 나아가는 길인 믿음, 회개, 세례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죄 사함의 길에 놓여 있으며 구원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